압력이 아니라 시장이 버린 교과서.  
압력이 아니라 시장이 버린 교과서.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4.01.12 2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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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교학사 역사 교과서가 학교로부터 외면당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 교과서는 지난해 8월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 심의에 최종 합격한 이후부터 줄기차게 논란을 생산해왔다. 이념적 편향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학계가 지적한 사실관계의 오류가 100건이 넘었다. ‘위키 백과’를 표절했다는 의혹과 구글과 네이버 등 인터넷의 사진을 대거 인용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도덕적 질타도 받았다.

교육부도 이를 인정했다.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 권고한 수정·보완 사항 829건 중 교학사 교과서가 251건으로 가장 많았다. 교육부가 가장 불량하다고 판정한 교과서가 시장인 학교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은 당연하다. 정부가 공인한 불량상품이 소비자들의 호응을 받을리 없다.

이 교과서는 교육부의 수정권고와 수정명령 등 두 차례나 부실을 바로잡는 과정을 거치고도 논란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일제가 의병을 ‘토벌’했다고 하고, 일제 자본의 조선 침탈을 ‘자본 진출’로 기술하는 등 친일적 서술이 여전했다. 한국인 위안부가 일본군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술한 부분도 고치지 않았다. 의병이 토벌의 대상이고, 위안부가 자의로 일본 군대를 따라다녔다는 주장은 일본의 우익 교과서 논조와 다르지 않다. 이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가, 교육부가 ‘부당한 외부’라고 주장하는 ‘전교조와 시민단체’의 압력에 맞서 선택을 고수하기에는 교과서의 흠결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결국 교육부의 부실한 검정과정이 부실한 교과서를 낳았고, 채택률 ‘제로’라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교가 이 교과서를 채택했다가 철회하는 과정에 외압이 개입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교과서 채택의 열쇠를 쥔 학교운영위원회는 전교조보다 학교쪽에 훨씬 친화적이다. 이런 성향의 학교운영위가 전교조의 압력에 무조건 굴복할리 없다. 굴복한 것이 아니라 논리에 설득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사정이 이런데도 교육부가 교과서 편수를 담당할 조직을 부활해 집필 과정에 개입하겠다고 하고, 여권에서 아예 국정교과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을 펴는 것은 가당찮다. 현재 교과서 국정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는 북한과 러시아·베트남·필리핀뿐이다. 편수부서를 두겠다는 발상은 일본 문부과학성을 연상시킨다. 일 문부성은 검정조사관을 두고 교과서 사실관계 검증뿐 아니라 정부 시각을 집필자와 출판사에 강요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식민지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후소사 교과서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해온 나라가 일본의 전근대적 교과서 검정 편제를 따르겠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교육부의 교과서 채택과 번복과정에 대한 조사도 석연찮다. 교사들이 학교운영위에 심의 교과서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학교장이 교학사 교과서를 넣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학교운영위를 열지도 않고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도 있었다.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했다 막판에 번복한 경북 청송여고가 그랬다. 그러나 교육부는 교학사 교과서 채택에 개입된 압력과 관련해서는 조사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교학사 교과서가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소비자인 시장의 심판을 받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부실한 검정체제를 정비·강화하고 최소한의 구색 정도는 갖춘 교학사 교과서가 교육현장에 제공되도록 해야 한다. 국정으로 발행하던 한국사 교과서를 지난 2002년 검정 제도로 바꾼 것은 학생들에게 역사를 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였다. 다양한 사고를 보장하는 민주사회의 작동원리를 포기하겠다는 발상은 무모할뿐 아니라 아주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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