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가리 꿈처럼
박주가리 꿈처럼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4.01.0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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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개울둑을 걷는다. 수크령과 쑥, 달맞이, 갈대와 억새무리의 겨울나기를 살피며 천천히 걷는 흙길이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촉이 좋다. 양옆으로는 잔설이 남아 있고 버들가지에는 참새가 앉아있는 모양의 박주가리 덩굴이 늘어져 있다.

가슴이 철렁했다. 몇 년 전, 건강치 못한 그이와 이곳을 걸으며 보았던 참새 모양의 박주가리 씨앗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짝 마른 덩굴에는 대여섯 개의 열매가 달려있다. 나무에 걸린 박주가리가 참새 같아 깜빡 속았던 그날을 회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용천을 누르듯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선바위 모퉁이에 이르렀다. 옆으로 이어지는 개울 얼음 속에서 흐르는 물소리, 이보다 아름다운 소리가 또 어디 있으랴. 혼자서는 도저히 올 수 없을 것 같던 이곳을 내가 다시 찾았다.

그이가 떠난 후 심한 무기력증이 내게 왔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걸음인 현실은 열등감이었을까. 아니면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미움이었을까. 그것은 온전히 내 스스로의 진단이고 나 자신을 괴롭힌 흔적이었다. 그래서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 모든 것에는 나의 이름도 포함되었다.

요즘 받는 교육연수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정체성을 이야기해 보라하셨다. 내 이름은 법卞, 바를正, 순한順, 바르고 순하게 살라고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뜻대로 바르고 순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심신이 고달프다고 생각될 때가 많았다.

생각해보니 내 이름을 자주 불러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누구 엄마, 여보 당신보다 내 이름 석 자를 불렀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나의 존재를 끊임없이 지지해준 사람이었다. 변 정 순- 하며 불러주던 그이의 음성,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

이번 연수는 내 이름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 자신을 믿는 사람, 내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나를 살리는 것이 타인을 살리는 것일 테고, 남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햇살이 곱다. 버드나무에 걸친 박주가리의 겨울나기를 카메라에 담아야겠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그림 같다. 씨앗이 다 날아간 꼬투리도 있고 이제 막 갈라져 씨앗의 흰 섬모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도 있다. 바람이 살짝 분다. 봄을 준비하기 위하여 날아가려고 꼬투리 밖으로 몸을 내민 씨앗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잡혔다. 한 올 한 올 하얀 섬모가 햇살에 비친 모습이 환상적이다. 꼬투리 속에 있는 씨앗을 조심스럽게 꺼내 흰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흰 털을 꼬리에 달고 가지런히 고개를 들고 있는 씨앗은 “요이 땡”하면 달려 나갈 태세다. 봄을 기다리는 모습 같다. 고개를 서로 맞대고 있는 씨앗들은 봄을 찾아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가 보다.

고운 바람에 씨앗하나가 날아오른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과거에 연연해 하지 않고 나도 목표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모든 경험이 나의 자산이 되고, 내 주위에 좋은 분들이 많아 내가 가진 장점들을 발견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동안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꿈을 천천히 꺼내 볼 요량이다.

박주가리의 꿈을 향한 비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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