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67…조씨 이야기(1)
단상(斷想) 67…조씨 이야기(1)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3.12.19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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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범시인의 지구촌풍경
윤승범 <시인>

내가 아는 조씨는 조(趙)가 아닌 조(調)를 성으로 쓰고 이름은 신(信)이라는 놈팽이가 있습니다. 사내가 천성이 게으르고 일하기를 싫어해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일찍도 접었습니다. 밥벌이라고 한다는 것이 오직 탁발(托鉢) 한 가지입니다. 말이 좋아 탁발이지 구걸에 좀 더 고상한 차원의 말이겠지요. 그렇게 얻은 양식으로 그저 제 주린 배만 채우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편한 세상을 살면서 제 주제에 도를 닦는답시고 다 떨어진 넝마옷을 걸치고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어 얼핏 보면 반 도사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사내에게 하늘이 두 쪽이 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초탈한 이 사내에게 드디어 세상의 문을 열어줄 오욕(五慾)이 생겨난 것입니다. 탁발 때 나가서 본 여인네를 접한 뒤부터 이 사내의 염원은 오직 하나로 귀결됐습니다. 어찌하면 그 여신급 여인네를 호릴 수 있을까, 그래서 오순도순 보드라운 살결을 부비면서 평생을 원앙처럼 살 수 있을까만 생각을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 저녁이었습니다. 삭정이 분질러 불 피워 밥을 하면서 부지깽이로 솥단지를 토닥토닥 치면서 흠모하는 여인네와의 희열을 꿈꾸고 있을 때였습니다. 난데없는 오토바이 소리가 부랑부랑 들리더니 분홍색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또각또각 꺾어 신은 여인네가 황금색 오토바이에서 내려 보자기를 풀더랍니다. 가져 온 보온병은 황금으로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인도네시아산 고양이가 커피가 끓고 있고 그 커피를 담은 컵은 금이요, 받친 접시는 또 금이요, 젓는 수저 또한 금이요, 설탕을 담은 그릇 또한 자꾸 금이었답니다. 커피 한 잔을 따라 바치며 나붓이 절을 하면서 하는 말이 - 저도 당신을 보는 순간에 제 미모는 오직 당신을 위해 가꾸어져 왔음을 알았습니다. 제가 여태 간직한 이 처녀성은 오직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던 것이지요. 제가 들고 온 이 모든 것들이 우리집 전 재산인데 당신과의 미래를 위해 쓰였으면 좋겠어요 - 하더랍니다. 앞뒤 생각없는 사내는 밥 젓던 부지깽이를 사정없이 내던지고 여인네의 손을 부여잡고 오토바이에 태워 어디론가 질정없이 도망을 쳤답니다.

천하의 백수건달과 절세의 미인이 짝을 이루었으니 누가 보아도 어색하겠지요. 더군다나 지역 주먹 우두머리 아버지의 전 재산을 훔쳐서 달아났으니 사랑의 달콤함이야 여전하겠지만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신세의 곤고함도 차고 넘쳤겠지요. 그러나 당장 눈앞의 꿀이 더 달게 마련. 훔쳐 온 금 쟁반과 금 그릇을 조금씩 팔아 백수로 사는 재미가 절로 났을겁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젊은 피부와 고운 살결.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사랑. 쳐다만 보아도 샘 솟는 열정. 밥 먹다 눈 마주치면 홍야~ 설거지하다 눈 마주쳐도 홍야~ 잠들려고 하다 눈 마주치면 또 홍야~ 눈 마주치다 잠깐 한 눈 팔다 눈 마주치면 홍야~ 자다 살 부딪히면 홍야~ 하여지간 엄청 좋았겠지요. 그리고 아이들도 생겼지요. 그러나 다들 살아보셔서 알겠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사랑 없고, 식지 않는 프라이팬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지요. 그것을 일러 인생 유전(流轉)이라 한다지요.

내일을 알 수 없으니 삶이 고달프지만 내일을 알 수 없기에 삶은 그만큼 흥미로울 수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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