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마침내 다 이루는 길
서른다섯, 마침내 다 이루는 길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3.12.18 1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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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大道(대도)는 氾兮(범혜)니 其可左右(기가좌우)니라 萬物(만물)이 恃之而生(시지이생)이나 而不辭(이불사)하고 功成(공성)이나 不名有(불명유)하며 衣養萬物(의양만물)이나 而不爲主(이불위주)는 常無欲(상무욕)이니 可名於小(가명어소)요 萬物歸焉(만물귀언)이나 而不爲主(이불위주)하니 可名於大(가명어대)인데 以其終不自爲大(이기종불자위대)하여 故(고)로 能成其大(능성기대)하느니라.

 

- 큰 도는 세상을 다 덮으니 왼쪽 오른쪽을 두루 안는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거기 기대어 살아가지만 생색내는 일이 없고, 공을 이루지만 거기 제 이름을 적어 넣으려 않으며 모든 것들이 거기 기대어 살아감에도 주인의 자리에 앉지 않고, 다른 의도를 품지 않으니 이름을 보잘 것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모든 것들이 또한 그리로 돌아감에도 주인의 자리를 마다하니 그 이름을 크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도 끝내 스스로 큰 자리를 바라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큰 것을 이루는 것이다.

 

이 본문을 볼 때마다 부끄럽습니다. 내 편 네 편을 나눠놓고 내 편은 善(선)이고 내 편이 아닌 쪽은 惡(악)으로 규정하려 했던 이분법적 사고를 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편이라 하더라도 잘못이 있을 수 있고, 저 편에도 얼마든지 장점이 있을 수 있으니 내 편과 저 편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상생하는 것이 생명의 진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도 저 편의 횡포나 폭력 때문에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장점들을 못 보게 되는 시력의 한계가 부끄러운 겁니다.

그런 내게 옛늙은이가 조용하게 다가와 말을 거는 겁니다.

“제대로 된 생명의 흐름(大道)이란 말이야, 좌우를 두루 안고 있는데, 그게 가슴의 넓이라는 거야. 저것 봐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나기도 하고 자라기도 하고, 그 품 의지해서 살고 사랑하는데도 뽐내지도 주인노릇도 하지 않으니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큰 것도 같은데, 크냐 작으냐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지. 누가 크다고 해도 크다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아 마침내 그야말로 제대로 된 모든 것을 이루게 되는 거 말야.”

도덕경에서 말하는 道(도)에는 굳이 ‘크다(大)’는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두어 군데 대도(大道)라는 말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이 바로 그 하나입니다. 전체의 맥락 상 大道(대도)는 ‘큰 도’라고 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도’라는 말로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게 되는 ‘마침내 이루게 되는 큰 것’으로서의 大(대)는 ‘모든 것’이라고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누고 맞서서 갈등하고 다투는 가운데서 제 몫을 챙기는 방식의 삶이 있고, 그것이 누리는 쪽에서는 얼마나 편리한지도 모르지 않는데 생명의 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니 그렇게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크지 않은 목소리이나 큰 가르침이 바로 여기 있음인데, 목사인 내 입장에서야 듣는 말로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한 예수의 최후가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한데, 성실함과 떳떳함이 어떤 관계에 있는 건지,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헤아리며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자리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은 겁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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