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날개 위에 오르다
나비의 날개 위에 오르다
  • 김혜식(수필가)
  • 승인 2013.12.1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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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의 가요따라 세태따라
김혜식(수필가)

앞마당에 꽃밭이 있는 집에서 자랐다. 봄이 오면 저마다 다른 모습의 꽃들이 서로 시샘을 하듯 피었고, 벌과 나비들이 그 꽃밭 속을 헤집고 다녔다. 벌과 나비는 추운 겨울 어디서 살다가 왔을까. 나는 벌과 나비와 더불어 그저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의 얘기론 내가 꽃밭을 바라보며 이따금 얼빠진 소녀가 되던 나이는 대여섯살 무렵이라고 했다. 나는 노랑나비가 제일 좋았다. 그래서 노랑나비 날개 위에 올라앉아 훨훨 날아다니면서 이 세상 많은 꽃들을 보고 싶었다.

나비가 꽃밭을 찾는 건 꽃향기 때문이고, 벌이 모여드는 것은 꿀단지 때문이었음을 철이 들고서야 알았다. 전라도의 무안에 연꽃 축제가 있던 날이다. 나는 거기서 그 옛날 춤추던 나비들의 후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비들을 만나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잔뜩 입을 오므렸던 연꽃이 수줍은 듯 입을 벌렸고, 벌과 나비들이 떼지어 날아와 꽃 판을 점령했다. 짝을 맞추어 날아 온 한 쌍의 호랑나비도 보였다. 그 옆에는 외짝의 나비도 있었다. 외짝은 심심한 듯 양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한다. 그러다가 다시 날개를 활짝 펼쳐 허공으로 치솟았다.

나비는 부분적 색맹이기에 예쁜 꽃 색을 취할 줄 모르고, 그러니 그들은 미의 본질을 알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나는 그리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상은 참 이상하게 바뀌고 있다. 부분적 색맹이란 나비처럼 우리 인간도 미적 추구의 본질을 상실하고 있다. 더 직언하면 미의 가치기준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얼굴의 잘잘못 생김은 미의 기준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체형이 가치기준의 우선시대가 되고 있다. 영상매체라는 기술이 도깨비 재주를 능가하는 시대이고 보니, 얼굴만 아름다운 것은 인체학적으로 허상이 되고 말았다.

그루밍족이란 신조어가 생겼다. 마부가 말을 빗질하고 목욕시켜주는데서 유래하였다는 말인데, 아무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성이 많아진 것만은 사실이다. 딸만 가진 부모에게는 사윗감 고르기가 더 어려워졌다. 남성 특유의 강인함을 선택해야 할지 아님 꽃미남이 적합할지 나 또한 고민이나 첫째 조건은 사람 됨됨이라 생각한다.

남성들에게도 여인을 취하는 조건으로 용모에만 구애받지 말고, 그저 여자로만 보아달라는 주문을 한다면 이 또한 사윗감 선택에도 적용해야 할까보다.

인간사의 모든 것을 아름다움이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여인은 남성에게 미적 제공의 임무가 있음에 앞서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대를 이어 주어야 하고,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가문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여인이란 인생은 언제나 고달프다. 앞마당에 꽃밭이 있는 집에서 자란 나는 그 꽃밭과 예쁜 나비와 그리고 벌이 남겨준 추억을 안고 산다.

‘나비소녀’라는 유행가가 있다. 노랫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예쁜 소녀 하나가/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캐러 가다가/ 꽃잎 속에 숨어있는/ 나비한테 반해서/ 나물 담을 바구니엔/ 예쁜나비가 가득/ 호랑나비 한 마리는/ 가슴에다 붙이고- (생략)

결혼은 인생의 이중창( 二重唱) 이라고 했다. 꽃만 보지 말고, 벌만 보지 말고, 꽃을 타고 다니는 나비의 화려한 날개 짓도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이게 아니어도 여인의 마음은 언제나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를 사로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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