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넷, 무엇이 더 요긴한 것인가
서른넷, 무엇이 더 요긴한 것인가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3.12.1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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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知人者(지인자)는 智(지)요 自知者(자지자)는 明(명)이며 勝人者(승인자)는 有力(유력)이요 自勝者(자승자)는 强(강)이며 知足者(지족자)는 富(부)하고 强行者(강행자)는 有志(유지)요 不失其所者(부실기소자)는 久(구)하고 死而不亡者(사이불망자)를 壽(수)라 하느니라.

- 남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할 것이고, 스스로를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며, 남을 이기는 것을 힘이 있다고 하고, 자신을 이기는 것을 억지라고 하며, 무엇이 만족인지 아는 사람을 부유하다고 하고, 힘써 행한 것을 뜻을 세운 사람이라 하고, 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을 영원하다고 하며,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을 참으로 오래 살았다고 할 것이다.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쯤에서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는데,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者(자)는 대부분 우리말의 ‘것(영어의 it)’으로, 그리고 人(인)은 그냥 ‘사람’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남(他人)’으로 읽는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 옛늙은이는 언제나 强(강)이나 力(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이기는 것을 强(강)’이라고 한다는 말은 다시 살필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의지가 몸을 통제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그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생각해 볼 것은 때로 글을 읽을 때 흔히 하게 되는 실수가 있는데, 둘 또는 그 이상의 개념을 서로 이어 놓았을 때 하나는 부정적인 것, 다른 하나는 긍정적으로 읽으려고 하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여기서도 知人者는 智요 自知者는 明이라고 했을 때 남을 아는 것보다는 자기를 아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식의 받아들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 그 바탕에 두어야 할 해석학적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동안 많이 이야기 한 ‘지금 여기 있는 나’라는 사실, 그것도 의지를 소유한 자아라는 점에서의 ‘나’가 아니라, 몸을 중심에 두고 있는 바로 그 ‘나’라고 읽는 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의지가 몸을 통제하는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몸의 욕구나 필요들을 지나치게 억제하고, 그것을 도덕적으로 성숙한 태도라고 치켜세웠던 겁니다. 인간이 단지 욕구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순서는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 도덕경의 가르침이고, 몸이 먼저이고 의지가 그 다음이라는 것이 전체의 흐름이라는 점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탕자리에 놓이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큰 틀에서 볼 때 남도 나도 이길 필요가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 옛늙은이의 가르침이고, 거기서 바로 知足(지족)의 윤리가 나오게 되며, 이것을 따를 때 저 있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살 수 있고, 몸은 죽어도 그 정신은 기억되는 삶을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오늘 가르침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이어서 살펴야 할 것으로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헤아린다면 바람직한 삶에 대한 규정을 함에 있어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은 겁니다.

부드럽고 열린 사고를 할 수 있을 때 그 삶이 너그러워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저 있어야 할 자리를 놓치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는 그런 삶이 아니겠느냐는 말로까지 들린다면 오늘 본문은 읽는 이에게 큰 보탬이 되는 약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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