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곱게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 오창근 <칼럼니스트·충북참여연대 사회문화팀장>
  • 승인 2013.10.16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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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충북참여연대 사회문화팀장>

TV 채널을 돌리다 언뜻 한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곱게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편린처럼 스쳐 간 말이지만 사연도 모르는 그 글귀가 온종일 마음을 잡는다.

세월을 철로 나누어 보는 생각이 익숙해 봄이 만화방창(萬化方暢)한 청소년을 뜻한다면 낙엽 지고 문풍지 찬바람에 우는 낙목한천(落木寒天) 겨울은 인생의 막바지를 이름이다. 그렇다면 온 산이 물드는 만산홍엽(萬山紅葉)의 계절 가을은, 중년 사내의 고독한 심사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매주 고향 가는 것을 거르지 않는다. 보은이니 차로 달리면 1시간 거리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늘 더디고 아프다. 5년 전 어머니 돌아가시고 혼자 사시는 아버지를 뵙고, 찬거리라도 마련해놔야 한다는 책임감에 5년 동안 거르지 않았다.

몇 주 전, 아버지는 절을 올리고 앉은 나를 살갑게 부르시고는 “너도 한번 생각해 봐라! 요 앞 주요소에서 일하던 최 과장이라는 사람 너도 알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과장이라는 직함에 4~50대를 생각하겠지만 일흔이 훌쩍 넘으신 분이다.

정년퇴임 후 소일거리로 주유소에서 일하시던 분인데 가끔 아버지 말동무도 해 드리고 해서 안면이 있는 분이지만 몸이 불편해 그만두신 지 오래됐고,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했다.

“예, 그런데 아버지 그분은 왜요?” “글쎄 얼마 전 그가 와서 말하기를 서울에서 살던 6촌 누이가 있는데 자식도 없고, 근처 요양원에서 생활하지만 그곳이 못마땅해 우리 안채를 고쳐 이곳에서 살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안채는 사람이 안 산 지 오래돼 많이 낡았지만 수리하면 그럭저럭 쓸 만은 하다. 아버지 혼자 계시는데 말동무라도 하면 나을 듯싶어 “저야 괜찮죠. 그래도 사람 살려면 수리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래도 괜찮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가끔 안채를 수리해 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아버지 편한 대로 하시라고 했다.

조금 있다 최 과장이란 분이 찾아오셨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신지 지팡이에 의지해 거동하셨다. 인사를 드리고 나니 혼자된 6촌 누이가 올해 여든여섯이고, 아직도 살림할 정도로 건강하시다며 아까 아버지가 하진 말씀을 되뇌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대뜸 그분께 “이봐, 최 과장 다음부터 내게 매형이라고 해!”하시며 덧붙이는 말씀이 “괜한 돈 들여 집수리할 것 없이 지금 사는 집에 방이 남으니 들어와 같아 살자고 해”라고 하셨다. 최 과장이란 분도 싫지 않은 듯이 내 생각을 물었다. 뜻밖의 상황이라 생각해 보겠다며 집을 나섰지만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

보은에 있는 여동생 집에 들러 상황을 설명하니 발끈하며 “아버지도 주책이셔. 아흔이나 된 분이 엄마 돌아가신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을 들여! 난 그분이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 다시는 안 봐!” 하며 형제 중 가장 효심이 깊은 여동생은 화를 잔뜩 냈다. 옆에 앉은 집사람 또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설명하며 안 된다며 시누이 편을 들었다.

매제는 "그래도 장인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려야 하지 않느냐"며 말을 거들다가 여동생에게 핀잔만 들었다. 남녀 간 이해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결국, 아버지의 계획은 그분의 사정으로 무산되었고, 가족의 소동도 잦아들었다. 그 다음 주 아버지를 찾아뵐 때 무척이나 상심한 듯 보였다. 그저 말동무가 필요했을 뿐인데 과한 걱정을 한 것이 아닌지 혹은 아흔이 되었지만 외로움을 넘어선 여인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지.

‘몸이 늙지 마음이 늙는 것이 아니다‘란 말처럼 인생의 황혼기에 곱게 물들일 단풍 같은 아버지의 행복을 헤아리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꽃은 지기에 절정의 아름다움이 있고, 삶은 노을이 있어 젊음이 빛날 수 있다. ‘곱게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화인(火印)처럼 남은 것은 아흔의 연세에 불현듯 찾아온 아버지의 설렘을 헤아리지 못한 자괴심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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