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람들’의 한계
‘내 사람들’의 한계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3.09.30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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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진시황이 7웅이 할거하던 중국을 통일하기 전이다. 7국 중 최강국으로 부상한 진(秦)나라와 국경을 접한 약소국 한(韓)나라는 늘 피침의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다 한가지 꾀를 내 입심이 뛰어난 수리(水利) 전문가를 진나라에 보냈다. 그는 진시황을 꼬드겨 전국의 하천을 아우른 초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토록 하는데 성공했다. 우리의 4대강 공사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진나라의 재정과 국력을 약화시켜 해외 파병의 여력을 없애려는 한나라의 술책임이 들통나 버렸다.

격노한 진시황은 외국 출신 관리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축객령(逐客令)을 공포했다. 이때 초나라 출신의 승상 이사(李斯)가 왕명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중국 문학사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이다.

이사는 상소문에서 축객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데, 그 첫머리에 출신국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널리 등용한 선왕들의 치적을 들었다.

“목공(穆公)께서는 서융에서는 유여(由余)를, 초나라에서는 백리해(百里奚)를, 송나라에서는 건숙(蹇叔)을, 진(晉)나라에서는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를 모셔와 기용했습니다. 목공은 이 다섯 인재를 발판 삼아 주변 20개국을 지배하는 패자로 군림하셨습니다. 효공(孝公)은 위나라 출신인 상앙을 앞세워 변법과 개혁을 추진해 부국강병의 터전을 일궜습니다. 혜왕(惠王)은 위나라 출신인 장의(張儀)의 계책을 받아들여서 6국의 합종책을 깨고 각국이 진에 복종하도록 했습니다. 소왕(昭王)은 위나라 사람인 범수를 발탁해 제후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국적을 불문한 인재 등용이야말로 진이 발전해온 원동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사가 언급한 4명의 리더와 참모들은 실제로 진의 천하통일을 논할 때 통일의 기틀을 다진 대표적 인물들로 꼽힌다. 진시황은 축객령을 즉각 철회했다.

진영 장관은 대통령의 핵심 브레인이자 최측근이다. 대통령의 당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거쳐 선대위의 국민행복추진위 부위원장, 대통령직인수위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으로서 입안 단계에서부터 완성 때까지 새 정부의 공약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핵심 대선공약인 복지를 국정의 중심에 둔 대통령은 실무 책임자로 그를 발탁했다. 무한 신뢰의 반증이다.

그런 그가 기초연금 후퇴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사퇴극을 벌였다. 이는 장관의 본분뿐 아니라 도의에서도 벗어난 짓이다.

국민을 설득하고 국정감사에도 임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 옹색한 핑계를 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은 업무에서 도망친 행위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그는 대통령의 리더십에 상처를 내고 야당에는 ‘주무장관도 반대하는 복지공약’이라는 공세의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대통령의 신뢰를 정면으로 배신했다.  

그는 언론에 사퇴설을 흘리며 청와대와 줄다리기를 벌이기도 했다. 대통령과 독대해온 자신의 위치를 과대평가한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윤창중 사건 때도 보았지만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자부심은 과대망상이나 심각한 자기 오판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이사의 ‘간축객서’대로 출신을 불문한 인재 등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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