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54 - 황량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4
단상(斷想) 54 - 황량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4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3.09.1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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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범시인의 지구촌풍경

윤승범 <시인>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인간사에 한정되어 있을 뿐인 듯 싶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바다가 솟아서 지금의 히말라야가 됐다는 - 믿기지 않지만 믿어야 한다는 - 5000미터 높이에 있는 호수물이 짭짜름해서 안 믿을 수도 없다는 - 그 산과 강은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산 정상에서 녹지 않는 만년설은 날카로운 이성(理性)을 지닌 현자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눈 녹은 산 아랫도리에서 양들 뜯어먹으라고 자라는 초라한 풀들은 그나마 가난한 자들을 위해 베푸는 아량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자세로 저 산들은 수 천 년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수 천 년을 더 가겠지요. 저 산이 다시 상전벽해가 돼서 바다가 될 때까지.

변한다는 것은 오직 유정물(有情物)에게만 해당되는 듯합니다. 피고 자라고 시들고 지고 하는 것들, 살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헤어지는 것들, 그런 애절한 감정들은 결국 유정물이 갖는 것일테니까요.

여행의 즐거움 중에 하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고 겪는 일도 껴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나와 다른 모습과 방식을 보면서 나를 조금 더 넓혀 가는 과정. 그것이 여행의 혜택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곳도 이제는 많이 변했습니다.

 워낙에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지라 호기심 승한 아이들도 없고 돈을 벌기 위해 나온 청년들은 여행자의 눈길을 끌기에 분주하고 나이든 노친네들은 제 삶에 함몰되어 나오지 않습니다. ‘헤이 프랜. 웨어 알 유 프롬’이라고 말을 거는 놈팽이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오면 오나보다 가면 가는구나, 저눔이 뭘 하고 가든 말든 내 식당에 들어와서 양고기 카레 한 접시 팔아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허름하게 지어놓은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와서 하룻밤 자면 돈이고 아니면 내 돈 아니고 하는 식의 정형화된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쉴 새 없이 틈을 노리면서 작은 바가지를 씌우기도 하고 덤터기를 얹기도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정신이 물질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체 현상을 봅니다.

여러 번 찾은 나라가 인도였습니다. 올 때마다 싸우고 다투고 갔지만 귀국 비행기를 타는 순간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만큼 무엇인가를 배우고 간 나라였다는 의미였겠지요. 그러나 서구화되고 물질화 된 지금의 모습에서 이제 더 이상 이 나라를 찾을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궁전은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겪고 있으니까요. 이제 인간세상은 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점점 유정(有情)물이 아니라 무정(無情)물로 변하는 과정을 겪고 있으니까요.

변한다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일관되게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작은 내가 조금 더 큰 산으로, 작은 도랑같은 마음의 내가 더 넓은 바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변하되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항심(恒心)이라고 하는 것. 그 것 하나 오로지 품고 흐른다면 바다에 닿아 푸른 빛이 될 것이고, 그걸 쌓으면 산을 이루어 저 히말라야처럼 당당한 무엇이 돼서 세상을 품겠지요.

그런 삶의 모습이 이루어질 때까지 어딘가로 가야 할 것입니다. 내 몸의 낡은 녹들 툭툭 털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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