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이 맞장구칠 역사 교과서
일본 우익이 맞장구칠 역사 교과서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3.09.09 2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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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고종이 1882년 8월 국민에게 내린 교유문(敎諭文)의 골자는 이랬다. “영국, 독일, 미국,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새롭고 정밀한 기계들을 만들어내며 산업을 부강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이들 나라들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있는데 우리만 거부할 수는 없다”. 고종이 일제강점이 시작된 한일합병 28년전에 이미 해외문물 도입과 산업화를 추구한 개화적 군주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구호에만 그치지 않았다. 12명의 시찰단을 일본에 보내 내·외무성 등 8개 기관의 서구문물 수용실태를 조사했다. 중국으로부터는 12마력짜리 발전기를 들여왔다. 무기를 제작하는 기기국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전기시설도 서둘러 추진했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88년 고종의 거처인 건청궁에서 첫 백열등 점등식이 있었다. 일본보다 불과 4년 늦었을 뿐이다.

1896년 철도망 확충을 위해 만든‘철도규칙 6개조’는 현재의 철로 표준궤와도 일치할 정도로 정교하다고 한다. 워싱톤 DC의 방사상 구조를 본딴 대규모 정비사업인 서울도시개조사업도 추진됐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당시 내부의 토목국장을 맡아 한성판윤 이채연과 함께 사업을 주도했다. 이채연은 서자 출신이다. 신분 구분없이 인재가 기용됐다는 반증이다. 이 근대화 사업들은 1904년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됐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군대를 한반도에 주둔시키며 노골적인 국권 탈취에 나섰다. 불리한 조약을 강요해 주권을 빼앗고 재정에도 개입했다. 매년 세입이 늘어나며 건실하게 운영되던 국가재정은 일본이 재정고문을 파견해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악화됐다. 일본이 국고를 빼돌렸다는 의혹이 짙다. 원활하게 진행되던 고종의 광무개혁은 일본의 침탈로 훼손됐음이 분명하다. 고종이 근대화 의지가 없고 무능해 망국을 재촉했다는 평가는 이런 사료들이 반박한다.

일본의 영자신문 저펜타임스는 최근 ‘한국 교과서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찬양한다(South Korean text lauds Japan colonial rule)’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이 지목한 한국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의 최종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이다. 신문은 “이 교과서가 일본 강점기에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등장하면서 산업화가 진행됐다고 서술했다”며 “이는 일본 식민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우며 한일합병을 합리화해온 일본 우익들이 맞장구를 칠만한 한국사 교과서가 탄생한 것이다.

문제의 교과서에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은 시간 사용의 합리화와 생활 습관의 개선을 강요받았다”는 황당한 논리도 담겨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지속될수록 근대적 시간관념은 한국인에게 점차 수용되어 갔다”고 결론을 내렸다. 일제가 한국어 교육을 필수화하고 강화했다는 무지한 주장까지 등장한다. 반민특위가 친일파 1호로 체포한 인사는 ‘민족 자본으로 일본 기업과 능히 경쟁한 기업인’이라는 식으로 옹호했다. 안중근 의사는 친일파도 들어간 이 교과서 색인목록에 오르지도 못했다.

압권은 을미사변을 다룬 사료탐구 항목이다. <생각해보기> 란에는 ‘당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과격한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라는 학습문제가 실려있다. ‘일본은 왜 명성황후를 시해했을까’라고 물으면 될 것을 마치 일본에 피치못할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그래서 되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런 덜떨어진 교과서를 만들어내는 방법밖에 없었던 것인가. 식민지시대를 미화하고 일제를 변호한다고 해서 친일이 감춰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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