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세상사, 구슬픈 노랫가락에 모두 흘려보내다
굴곡진 세상사, 구슬픈 노랫가락에 모두 흘려보내다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3.09.05 1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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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노동을 소리로 달래다-충북의 소리를 찾아서
<16> 음성 감곡 사곡리 상여소리


1980년대까지 대동계 의무적 가입 … 상조까지 관장
마을 슬픔 함께 … 가구당 한사람씩 24명 선발해 상여매

노랫말 속 장례풍습 그대로 … 효·인간 됨됨이 강조도
화장 보편화·종중 납골당까지 … 사라지는 전통 아쉬워

음성 감곡면 사곡리 마을은 유난히 정이 넘치는 마을이다. 날씨가 추운 겨울이면 노인회관에 모여 따뜻한 정담을 나누며 추위를 거뜬히 넘긴다. 여름철에는 마을 중앙에 버티고 있는 300년 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워주는 정자에 모여 장기를 두며 더위를 물리친다.

사곡리는 마을을 지키는 느티나무 만큼이나 오랜 시간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오롯이 지켜온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어르신들께 상여소리를 청했더니 “불러본 지가 오래돼 문서가 있어야 부를 수 있다”고 했다. 문서란 노랫말을 적어놓은 가사집을 말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불러달라고 했더니 “그럼 연습 한 번 해 볼 테니 찍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카메라 셔터를 몰래 작동 시켰다. 오히려 더 자연스런 장면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여소리를 가장 잘 불러 선소리꾼을 맡은 김동순씨(72)를 따라 마을 어르신들이 뒷소리를 불렀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상여를 메고 같이 불러온 노래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호흡이 척척 맞았다. 실제로 상여를 메고 가면서 부르는 것 처럼 모두들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김씨의 소리가 어찌나 감동적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노래였다. 상여가 산모퉁이를 지나 장지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듯한 현장감을 느꼈다. 뒷소리를 부르던 동네 어르신들도 점점 고개를 숙였다.

“누가 죽었어요?” 멀리서 상여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곡리 마을은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대동계에 가입했다. 대동계에서 상조까지 관장해 오다 1980년대에 해산했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대동계장이 상여꾼을 선발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밤샘을 하면서 슬픔을 함께 했다. 남성들은 볏집으로 상주 앞에 두는 베게나 상주가 문상을 받는 공석이라고 하는 거적을 만들고 여인네들은 상복을 깁고 제사음식을 장만했다. 지금은 장례식장에서 하는 일을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직접 했다. 보통 3일장을 치렀다.

이웃의 아픔이 내 아픔이고, 이웃의 슬픔이 곧 내 슬픔이었던 이웃들은 쌀 한 말 값, 막걸리 한 말 값 정도의 현금을 부조했다.

현금 대신 쌀 한 말, 막걸리 한 말, 팥죽 한 동이, 떡 한 시루 등을 준비해 부조를 하기도 했다. 팥죽은 밤샘을 하는 사람들에게 밤참으로 나누어 주었다.

지금과 달리 동네에 젊은 사람이 많았기에 상여꾼을 한 집에 한 사람씩 24명만 선발해서 돌아가면서 상여를 멨다. 젊은 사람이 없는 지금은 꽃상여를 멜 12명 채우기도 힘들다.

상여는 결혼을 한 사람만 멜 수 있었다. 상여가 나가기 전날 빈 상여를 메고 소리 연습을 하는 대도듬도 있었다.

가난한 집은 짚을 틀어서 상여의 어깨끈을 만들었고 부잣집은 광목 1통으로 어깨끈을 만들었다. 상여꾼들도 삼베로 만든 건을 머리에 쓰고 양쪽 다리에는 행전을 맸다.

가난한 시절 장례식이 끝나면 상여꾼들은 삼베건과 행전으로 수건을 만들어 썼다. 광목 한 통도 잘라서 나누어 주었다. 상가에서는 감사의 표시로 상여꾼들에게 고무신, 수건, 장갑, 담배 등을 나누어 주었다.

상주 옷도 부잣집은 삼베로 했고 가난한 집은 누런 생광목으로 했다.

사곡리 마을 입구 동산에는 곳집이라고도 불리는 상여집이 있었다.

황토흙과 돌로 벽을 쌓아올린 작은 초가집이었다. 해마다 지붕의 이엉을 새로 엮어 덮어 오다가 1970년경에 함석으로 개량했다. 상여와 요령은 장례를 치른 후 곳집에 잘 보관해 두었다. 마을에서 보물로 여겨왔던 곳집을 2006년 허물었다. 상여는 몇 차례 새것으로 바꾸었지만 요령은 마을에서 100년 이상 사용해왔다.

오랫동안 사용해서 나무로 만든 손잡이가 반들반들해졌다.

마을 하천 축대를 쌓는 노임을 절약해 1970년대 후반 충주에서 15만원에 상여를 새로 구입해 2002년까지 사용하다가 불태웠다. 지금은 일회용 꽃상여를 사용한다.

선소리꾼 김씨는 사곡리 토박이로, 마을 전통상여의 산증인이다. 김씨는 사곡리 마을 풍경과도 같은 사람이다.

결혼한 후부터 상여를 메고 뒷소리를 하던 김씨는 마을에 초상이 났는데 요령잡이를 할 사람이 없어서 주위사람들의 권유로 30대 초반에 처음 요령잡이를 시작했다.

김씨가 부르는 상여소리의 사설은 주로 효와 인간의 도리를 강조한다. 노랫말에는 조상들의 장례풍습이 그대로 녹아 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인 것이다.

김씨는 그동안 요령잡이를 100번도 넘게 했다. 조상들이 부르던 상여소리는 세월을 따라 김씨에게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김씨의 얼굴에도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는 노인답게 어쩔 수 없이 주름이 생겼다.

예전에는 초상이 나면 마을 뒷산 등 매장하는게 보통이었지만 요즘은 공원묘지나 납골당을 많이 이용한다.

사곡리에서도 개인 장지 매장은 재작년에 한 번, 작년에 1번만 했다.

장례 풍습도 세월 따라 변해간다.

옛날에는 장지가 멀리 있어서 10리를 상여를 메고 간적도 있었다. 지금은 먼 거리는 상여를 트럭에 싣고 가다가 차가 못가는 곳에서부터 상여를 메고 간다.

김씨는 “상주들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상주가 데굴데굴 구르면서 어찌나 애통하게 우는지 동네사람들이 모두 슬프게 따라 울고 나도 우느라고 소리도 제대로 못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상주들이 곡도 안 해요. 간소하게만 하고 우는 사람도 없지요”

대부분의 사곡리 주민들은 얼마전까지도 “왜 두 번 죽느냐”며 화장장을 반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화장이 보편화되면서 종중 납골당을 만들어 놓은 집도 생겼다.

김씨는 “나 죽으면 매장장은 하겠지만 선산 입구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게 길을 포장해 놓아 상여는 필요 없다”고 했다.

장례식장 장의차가 바로 묘지 앞까지 오기 때문에 상여가 필요 없는 것이다. 교통이 불편하면 자식들이 안 온다. 그래서 길을 닦아 놓았다고 했다.

요령잡이도 마을 젊은 사람한테 물려주었다. 산림을 훼손하는 묘지의 문제도 심각하다. 그러나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가 사라지는 것 또한 아쉽다. 김씨의 구슬픈 소리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돌아오는 길. 정 많은 어르신들이 뒤따라 나오며 정성을 다해 배웅을 해준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 손을 흔들다 고개를 돌리니 석양이 손에 잡힐 듯 아름답다.

저 노을빛처럼 우리네 인생 또한 어느 순간 노을로 사라질 것이다.

따뜻한 마음을 내주던 사곡리 어르신들의 깊은 정이 새록새록 밀려오고, 김씨의 상여소리도 가슴 저 밑에서 아련히 들려온다.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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