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 연규민 <칼럼니스트>
  • 승인 2013.07.30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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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연규민 <칼럼니스트>

‘광야의 웃음소리’라는 책이 있다. 부제는 ‘우리 시대의 예언서’이다. 20년이 다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는 것은 20여 년 전으로 세상이 다시 돌아간 까닭이다. 다시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다. 돌팔매나 화염병 대신 촛불을 든 게 다르기는 하다. 20여 년 전에 언론은 군중을 폭도 정도로 대접한 것 같다. 지금 언론은 광장에 모인 군중을 보아도 못 본 척 해야 하는 ‘헤어진 애인’이나 배신하고 나온 집의 ‘주인’을 길에서 만난 듯 외면한다.

이 책에 ‘국가불안기획부’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시절에도, 아니 그 이전 중앙정보부 시절에도 이들의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심지어 소속 직원의 가족도 고문하다 죽였다. 당연히 은폐하고 왜곡했다. 이들의 이름이 바뀐 것은 그간의 악행으로 더렵혀진 이미지를 벗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국가불안기획부’로 불렀다.

그래서 또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줄여서 국정원이라 부르는데 시민들은 ‘걱정원’이라고 부른다. 참말 국가의 큰 걱정거리다.

중요한 신문매체나 공중파 방송이 국회에서 열리고 있는 국정원 선거개입 등에 관한 국정조사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다. 미끈한 각선미를 보여주는 응원소녀나 야구장에서 시구하는 여배우의 근사한 몸매, 아슬아슬한 노출로 혼을 빼놓는 영화제 배우들의 입장 장면 때 보이는 수많은 기자들은 다 어디 갔을까? 국회 국정조사장 절반은 텅텅 비어 있단다. 촛불 들고 모인 군중들의 외침을 취재하기는 하지만 보도는 되지 않는단다.

결국 촛불 현장에서 공중파 방송기자들이 쫓겨나고 망신당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오로지 인터넷 방송만이 국정조사 과정을 보도하고 촛불군중의 외침을 전하고 있다.

오래 전 읽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란 칼럼이 생각났다. 어느 책에서 본 것인지 찾지 못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최근의 글에서도 무척 많이 인용하고 있다. ‘로베레 장군’ 이라는 영화 이야기다. 나치정권에 대항한 레지스탕스들이 무참히 처형당한다. 저항운동에 한 번도 참가한 일이 없는 사람이 경찰의 실수로 잡혀와 처형의 위기에 처했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저항운동에는 관심도 없고, 참여한 일도 없다. 내가 저들과 함께 죽는 것은 부당하다”고 외쳤다.

이때 레지스탕스 대원이 그를 향해 말한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으며, 도시가 파괴되었다. 조국과 민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는데 도대체 당신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랬다. 드골이 2차 대전 이후에 나치 시절 침묵한 언론인들을 처형했다. 우리나라는 군부독재를 찬양한 언론과 언론인조차 아무런 처벌도 하지 못했다. 일제에 아부한 언론을 처벌하지 못한 원죄 때문이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정리하고 가야한다.

일제와 군부정권에 아부한 언론과 언론인을 단죄하는 것은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언론과 언론인도 확실하게 축출해야 한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민에게 알려야 할 위치와 책무를 담당하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코 커다란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선진국이라면 당연한 결정을 우리 사회에선 ‘영단’이라 부른다. 상식을 ‘도덕성’이라 부른다. 합리적인 조치는 ‘특별한 배려’가 되었다. 바른 생각, 합리적 행동이 설 자리를 잃었다. 너나없이, 위아래 없이 거짓과 속임이 생활이 되었다. 광야의 웃음소리는 이러한 우리사회를 ‘벼랑을 향해 질주하는 자동차’라고 말한다.

불법과 부정을 위해 막대한 국가예산을 편성해 국가기관을 운영하는 나라에서 침묵과 좌시는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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