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쪽 농부, 대쪽 기록자 윤기완씨
<15> 대쪽 농부, 대쪽 기록자 윤기완씨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3.07.25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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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 충청인의 기록으로 본 시대읽기

30년 영농일기·마을 회의록… 부농의 꿈 고스란히

25살 결혼후 진천 은암리서 부농의 꿈 키워
누에·담배농사 등 수입·지출 달력에 '빼곡'

배움의 소중함 경험 … 쌀 장학금 내놓기도
꼼꼼히 적힌 기록, 농업정책 삶의 궤적으로

충북 진천 초평 은암리에 사는 윤기완씨는 25살에 결혼한 뒤 평생을 흙과 함께 보낸 농부다.

‘삶이 흙이다’고 정의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 농부로 살았지만, 2000년 자식들 앞에서 농사일 중단을 선언한 뒤 유유자적 시골 생활을 음미하고 살고 있다. ‘그동안 일하느라 고생했으니 이제는 편해질 권리가 있다’는 게 농사 중단의 이유다. 자신의 일부분이나 다름없는 땅마저도 당당히 내려놓을 줄 아는 윤기완 어르신의 모습은 대쪽같은 선비를 보는 듯하다.

이는 26살 파릇한 청춘이 종중의 땅을 경작하며 한 마지기 한 마지기 땅을 늘려 부농으로 일가를 이룬 어르신의 삶의 궤적과도 맞닿아 있다. 큼지막한 시골 달력에 칸칸이 적어 놓은 하루의 일과와 1976년부터 2002년까지 쓴 영농일기, 그리고 마을이장을 맡아 기록한 회의록은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역사이자, 생생한 현장이 기록물이다.


◇ 1976년부터 2002년까지 쓴 영농일기

못하나 꽂을 땅도 없었던 윤 어르신에게 초평 일대의 많은 논과 밭은 40여 년을 농사에 전념해 얻은 정직한 결과물이다. 누에농사로, 담배농사로, 벼농사로 얻은 수확은 5남매를 키우고, 농토를 마련하는 밑 자산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부농의 꿈을 안겨줬던 정부의 농업 정책은 가난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한 서민들의 애환도 짙은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어르신의 70년대 쓴 영농일기장은 마분지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수첩이나 깨끗한 종이를 사기도 어려웠기에 문서지 이면을 사용하고 있다. 누런 마분지 일기장에는 정부미와 혼식을 권장하는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농부의 심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혼식 장려에 성난 농심을 달래고 설득하기 위해 군기관장이 마을 순방해 농민과 대화를 가졌던 기록도 남아있다.

-쌀도 백미를 먹든 일반미 먹든 정부미 먹든 경제대로 구입 먹을 탓이지 어째서 일반미를 묶어두는지 모르겠다. 정부미만 좋은 품질로 결정 보급하면 그만이지 동결한다는 것은 가제나 도시집중을 막을 도리없다고 하는데 쌀값 비싸고 수입을 왜 하는가, 도시집중이 치열한 이때 시골농촌 생산되는 소 값, 수입 돼지 수출 막고 일반미 동결하고 시골 촌놈만 잡는 셈이다. 한 예로 10만 원이 모자라는 농민이 1년 쌀이 모자라는 관계로 일반미를 시장에 팔고 정부미 사다 먹고 있으며, 혼식 분식 강제 장려할 때도 농민들은 너무 혼식, 너무 분식했음을 말하고 싶다.… <중략>… 시골 땅값 2000원 선 떨어지고 소도시 텃값 갑절 오른 것은 무슨 國(국)탓입니까 이런 엽서 싫어하겠지만 정책은 얼어 죽는 사람, 되어 죽은 사람 없어야 할 터 인네….-(1978년 2월 11일)-

-우리나라는 77년 식량 자급자족된다고 정부에서는 발표했다. 2년도 못 간 채 부족된다고 몇만 큰 수입을 한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혼식 장려를 극히 권장하는 상 싶다. 또한 잘 침투되는지가 의심 걱정이다. 그 예로 3월 12일 진천군수님이 우리 면을 방문 오셨다. 나는 건의를 ‘보리를 농민이 갈아 수확 후 정부 매상을 하시도록 하여 주세요’ 말했다. 과연 ‘여러분 혼식을 좀하여 주세요, 남부지방의 보리가 창고마다 가뜩 가뜩 차여 있읍니다’말씀하셨다. 그러면 ‘외국에서 사료용으로 드려오는 옥수수를 수입하지 말고 국내 가뜩 쌓여 있는 보리를 옥수수 대치로 사료를 만들면 농민 소독도 사료 단가도 쌓을 듯 생각됩니다’,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건의해보지요’.-(1980년 4월 8일)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농업정책에 대한 농민의 심정과 더불어 일기장에는 자식들 공부 걱정과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 피해도 큰 걱정거리다. 농업이 국가 경제지표에서 뒷순위에 있다 보니 농부들의 삶은 여전히 쪼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윤 어르신은 “가족이 싸우는 이유가 세 개 있다. 돈에 째여서, 일에 째이서, 마음이 째여서다. 농사를 짓던 우리는 일에 째여서, 일이 너무 힘들고 고되어서 많이 다퉜다”고 들려줬다.

또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는 큼직한 농촌 달력에 메모했는데, 1년 농사를 지었을 때 수입과 지출을 알 수 있도록 기록했다”면서 “기록한 것을 대략 분류해 보니 농작물도 10년 단위로 변화해 70년대는 누에농사, 80년대는 담배농사, 90년대는 벼농사를 주로 지었다”고 말했다.

◇ 세밀한 부분까지 정부정책을 시달한 1970년대 마을 회의록

이장을 맡았던 어르신은 1970년대 마을 회의록도 보관 중이다. 청양회관에서 열렸던 마을 회의는 밤 21시부터 22시까지 진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농번기에는 밤시간대 회의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회의 안건을 보면 당시 정부가 작은 마을단위까지 어떻게 관장하고 정책을 어떻게 세밀하게 시행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농부로, 이장으로의 일상과 회의를 꼼꼼히 기록한 윤 어르신은 “개발이 시작되면서 곳곳에서 종중 땅을 두고 재판이 많았던 때가 있었다. 재판을 보면서 날짜와 기록의 신빙성을 알게 돼 기록하게 됐다”면서 “가족들도 내 앞에선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날그날을 기록해 놓아 허튼 말을 하면 당장 들킨다. 나 역시 말을 하면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말을 하는 순간 그대로 시행한다”고 말했다.

말이 법이듯 기록에 있어서도 가감이 없다. 자신의 일을 소상하게 쓰는 것만큼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당당하게 인정하는 어르신의 말씀에서 대쪽같은 성품을 느낄 수 있다.

“노름꾼이었던 아버지가 고등학교 갈 무렵 돈을 벌게 돼 그 덕에 고등학교를 나올 수 있었다”는 어르신은 “당시 부모들은 땅을 사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큰 덕으로 알았는데 아버지는 땅이 아니라 학교를 보내주셨다. 배울 기회를 주신 것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고 회고했다.

배움의 소중함을 경험한 어르신은 농사로 수익이 나면서부터 쌀을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한 나눔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았던 윤기완 어르신은 이제 자신에게 가장 멋진 선물을 선사하는 것으로 힘든 삶을 보답받고 있다. 하얀 의상에 하얀 구두까지 은암마을 멋쟁이 할아버지로 거듭난 어르신의 모습에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의 너그러움이 전해진다.

◈ 기타 기록들

△1976년 6월 30일 / 청양회관 / 참석인원 29명/ 불참인원 9명/

발언내용- 퇴비증산, 하곡수매, 새마을 사업, 수도병충해방제, 국어순화운동, 불온삐라 습득 신고 철저, 마을금고 육성, 북괴동향

△1976년 7월 11일 /청양회관 / 참석인원 23명/ 불참인원 15명

발언내용- 퇴비증산, 멸공교육, 북괴의 대남 전략, 부락공동물, 시설물 관리, 수도병충해 방제교육, 하곡수먀, 화전정리

△1976년 8월 25일 /청양회관 / 참석인원 30명/ 불참인원 7명

발언내용- 8.18 북괴만행의 진상, 추석절 의례간소화, 새마을 총열실시, 저동수상자 식별 요령, 수도병충해방제, 녹사료 생산 수매, 추석절 불우이웃돕기

△1977년 1월 25일 /청양회관 / 참석인원 26명/ 불참인원 명

발언내용- 우리마을 농장에 76년 토목관구지방도록 공사로 농로가 막힌 결과 구농로에 신도로의 구배가 높아 우마차가 통행불편함으로 고쳐줄것 누차 건의했으나 해답 없음. 우리마을 지방도로에 우회도록 만들었으므로 마을에 는 도로상에 점도 구역 해제 건. 도로 만들때 농경지 들어간 지상물 보상건. 회관 건립, 마을에서 기술진으로 해보겠다.

△은용이 육성회비 미납으로 할교에서 다시 돌아왔다. 옛날 학교는 외상으로도 1년을 바득빠득 다녔는데…미암은 청주학원 간다고 했다 돌아왔다 서류 및 입학금 때문에.-(1978년 3월 4일)

△간밤에 번개 밑 바켓스로 쩐지는 정도. 비가 밤샘으로 온다. 역시 많은 비로 농장 피해예상으로 잠이 오질 않는다. 자고 5시경 농장을 손질 그러나 괜찮다. 역시 그런것 사람산다는 정도일까.-(1979년 8월 5일)

◈ 윤기완씨(73)

1939년 충북 진천군 초평 출생.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 정착해 평생을 농업인으로 살았다. 25살에 결혼해 이듬해인 1967년 현재 살고 있는 초평면 은암리에 터를 잡고 40여년을 잠업과 담배 농사, 벼 농사에 전념하며 자립했다. 또한 1976년 은암리 마을 이장을 맡아 11년동안 마을을 위해 봉사했다.슬하에 4남 1녀를 두었으며, 현재 은암리에서 아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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