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현실과 근원의 오묘한 관계란
열다섯, 현실과 근원의 오묘한 관계란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3.07.15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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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視之不見(시지불견)이니 名曰夷(명왈이)요, 聽之不聞(청지불문)이니 名曰希(명왈희)요, 搏之不得(박지부득)이니 名曰微(명왈미)라, 此三者(차삼자)는 不可致詰(불가치힐)이니 故(고)로 混而爲一(혼이위일)이니라.

其上不皦 (기상불교)하고 其下不昧(기하불매)하나 繩繩不可名(승승불가명)이나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이니 是謂無狀之狀(시위무상지상)이요 無物之象(무물지상)이니 是謂恍惚(시위하황홀)이라.

迎之不見其首(영지불견기수)요, 隨之不見其後(수지불견기후)라, 執古之道(집고지도)하여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하면 能知古始(능지고시)니, 是謂道紀(시위도기)니라.

 

- 본다고 하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으니, 굳이 이름을 붙이면 이(夷)라고 할 것이고, 귀로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으니, 이름을 붙이자면 희(希)라고 할 것이며, 손으로 쥐려고 해도 만져지지 않는 실체가 또 있으니 이름하여 미(微)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따져 물어서 답에 이를 수는 없으나, 보이는 것 안에 모두 담겨 있다./ 그것은 위라고 하여 밝지 않고, 아래라 하여 어두운 모습도 아니며 언제나 흐르고 이어지는데,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근원을 살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일러 모양없는 모양이요, 실체처럼 보이지 않는 실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를 일러 아름다운 생명의 신비라고 한다./ 맞이한다고 하여 그 머리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뒤쫓는다고 하여 꼬리가 확인되는 것도 아닌데, 예로부터 전해지는 큰 가르침을 가지고 현실을 비춰본다면 맨 처음의 자리를 알 수는 있으니, 이를 일러 내 가르침의 벼리라고 한다.



이 장은 참 재미있습니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夷(이)나 希(희), 그리고 미(微)는 거의 고유명사와 비슷한 것이라서 번역을 하려고 하면 그만큼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입니다.

다만 이 말들을 통해서 하려고 하는 말은, ‘현상(보이거나 들리거나 손으로 만져지는 것)’을 확인하지만, 그 ‘현상의 배후(夷, 希, 微)’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나, 틀림없이 다양한 배후가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는 정도로 듣고 넘어가면 될 것입니다.

편의상 그렇게 이름을 붙여놓고 그것을 쫓아가는 길들을 이렇게 저렇게 그려놓고 있는데, 그것을 문맥을 가지고 살피는 것보다는 한 씨앗이 있는데, 그 안에 그 씨앗이 싹터 자랐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살피는 방식, 그러니까 잎이나 꽃, 또는 열매 같은 데서 씨앗을 살피는 유추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크게 어그러짐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씨앗 자체도 하나의 현상이고, 그 배후에 또 더 궁극적인 것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럴 때에는 씨앗에서 그것이 싹터 자랐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입니다.

비슷한 접근방식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하나의 상황이지만, 그 상황의 배후에는 단지 현상만 가지고는 헤아리기 쉽지 않은 엄청나게 많은 작용들이 있었다는 것, 하나의 현상에서 배후를 읽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생각한다면,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미 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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