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한다는 것
무엇을 한다는 것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3.07.14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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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행복칸타타
강대헌 <에세이스트>

무엇을 한다는 것

오늘은 지난 5월 20일자 칼럼에서 피아노 즉흥연주와 관련해 소개한 적이 있던 백석예술대학교 김준희 교수의 <음악을 한다는 것〉이란 제목의 글을 옮겨 여러분께 알려 드리고 싶군요. 혼자 읽기에는 아까운 글이라서 용기를 내어 당사자의 동의를 얻었답니다. 김 교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면 관계상 다 싣지는 못해, 부분적으로 내용을 잘라낸 것에 대해선 무척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는 과정임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음악을 한다는 것은 도(道)를 닦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음악은 넓게는 작곡을 포함하여 모든 연주를, 좁게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도를 닦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면 사부는 '도의 지름길'을 알려줄 법도 한데 그저 머슴살이만 죽도록 시킨다. 제자들 중에는 분명 물 긷는 재미를 깨닫는 이가 있다. 아름다운 오솔길, 신선하고 맑은 공기,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계절마다 바뀌는 숲 속의 오묘한 풍경. 그것이 곧 수련의 즐거움인 것을…사부는 안다. 그들의 물 길어 오는 표정만 보아도. 사실은 그 머슴살이가 바로 도 닦는 과정인 것이다. 음악가(피아니스트)가 되는 길도 그와 비슷하다.

음악을 하는 것이 무슨 신선놀음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면 큰 오산이다. 초보자가 처음부터 수려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내기란 불가능하다. 때로는 걸음마를 배우듯이 매우 느리게, 한 손씩, 때로는 한 마디를 가지고 몇 시간 이상을 연습해야 한다. 손끝에는 굳은살이 박이며 주먹을 쥐면 피아니스트임을 나타내는 특정 부위의 소근육이 우뚝해 보일 만큼의 긴 세월이 필요하다. 물론 보통 사람들이 10년, 20년에 얻을 것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성취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들도 똑같은 시기를 거친다. 좀 더 빠르고 심오할 뿐.

피아노의 경우, 단지 한 음을 친다 해도 그 음을 누르는 각 손가락의 압력, 타건(打鍵)의 속도, 타건 시 닿는 손가락의 부위, 터치의 방향, 타건의 전동작과 후동작, 팔 무게의 활용여부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수만 가지의 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손가락 관절 역시 섬세하게 조절되어야 하며 손끝의 감각으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어야한다.

피아노 치기는 소근육 운동인지라 어릴 때부터 훈련이 필요하고 그 훈련은 잠시의 휴지기(休止期)도 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악보에 표기되어 있는 수많은 콩나물들과 각종 지시어들. 이것을 실수 없이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반복훈련-지구력과 체력 그리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밑 빠지지 않은 독'에 차곡차곡 물을 채워가듯이 연습에 몰두하며 그 과정 자체를 뿌듯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음악가가 될 충분한 자질이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여정을 통해 피아노는 두려운 존재, 싸워야하는 존재가 아닌, 상호 소통이 가능한 친밀한 존재가 되며 음악적 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음악은 눈보다 귀로 하는 것이다. 청각장애인 이 된 이후에 쓴 베토벤의 곡들은 눈을 감아도 건반이 보이듯이, 귀가 닫혀도 소리가 들리는 단계에서 작곡되어진 것이다. 그는 그의 작품을 내면의 귀로 완전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들을 수 없다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만큼 예민한 음악적 귀는 필수이다. 왜냐하면 정말 중요한 것들은 악보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피아노라는 악기를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인 양 노래하고 호흡하며 자신의 음악을 만들 때, 연주자의 타고난 것들이 빛을 발한다. 명민함, 순수함, 예민함, 감정의 풍부함과 표현력, 상상력, 창조력 등 연주자의 심성이나 성격이 연주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마치 보이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연주자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노래에 스스로 감동할 수 있을 만큼 음악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 감동을 듣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마침내 연주자와 듣는 이가 동시에 무아지경(無我之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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