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46 - 무릉 가는 길
단상(斷想) 46 - 무릉 가는 길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3.07.12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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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범시인의 지구촌풍경
윤승범 <시인>

장 구경 다니는 즐거움이 솔솔합니다. 쉬는 날 아침에 눈 떠서 막걸리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덮던 이불 널어놓고 자고 있는 집사람 몰래 차를 몰고 나갑니다.

가는 길만 세 시간 정도 걸리는 장터에 들러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앉았다가 술 깰 때까지 장 구경하다 옵니다. 장터는 분잡해도 날 스쳐 가는 모든 풍경들이 흥겹고 슬프고 애절합니다. 내 생각의 절반은 이렇게 호젓한 곳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파장 무렵까지 앉았다 오는 길 또한 즐겁습니다.

시골 장은 파장도 일러서 점심 나절이면 끝입니다.

쉬엄쉬엄 국도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마지막 마을을 떠난지 한참이고 앞으로 남은 마을도 먼데 노인 한 분이 보기 드믄 삼베 바지를 후줄그레 입고서 망태기 하나 짊어지고 아스팔트 길을 걸어 가십니다. 가다가 차를 돌려 세웁니다.

‘어디까정 가셔유?’ 묻자 저 산 뒤를 가르키시면서 ‘저기 어워디~ 뭐라뭐라 중얼중얼 궁시렁궁시렁혔네’ 알아듣지 못할 사투리를 듣느니 차라리 모시는게 낫겠다 싶어 태워 드립니다. 노인이 손�!求� 곳은 차로도 한참을 더 가서 비포장을 들러 덜컹거리며 오래도록 가는 길입니다. 마을도 없는 곳에 흙과 돌로 지은 옛 집이 있습니다. 그곳이 노인의 집이고 거기에는 호호 할머니로 늙은 할머니 한 분이 마늘을 묶다 말고 굽은 허리를 펴서 할아버지를 맞습니다. 내려 드리고 돌아서려 하자 차를 막아 세우십니다. 할아버지가 나를 막는 동안 할머니는 ‘정지’에 들어가 - 이 때에는 부엌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정지’가 맞습니다 - 드시다 만 댓병 소주와 다듬어 깐 생마늘과 누르익은 된장을 퍼가지고 오십니다.

할아버지와 평상에 마주 앉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도시로 나간 아들네미 딸네미 이야기를 하시는데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해도 뜻은 알겠으니 반 병 소주가 금방입니다. 한참을 있다 ‘갈게유~’ 했더니 할머니가 검정 비닐 봉다리에 담긴 것을 차에 후딱 던지십니다. 뭔가 보니 갓 캐어 흙만 털어낸 마늘 한 웅큼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나오며 뒤를 봤더니 흙집과 돌담은 오래된 풍경으로 그냥 서 있습니다.

술도 깰 겸 마을 입구의 계곡에 발 담그고 앉았습니다. 작은 계곡에는 솜털같은 송사리들, 물고기들이 떼지어 놀며 나왔다 들어갔다 합니다. 저 작은 것들이 살겠다고, 살고 있다고, 놀자고, 놀고 싶다고 내 발등을 물고 스치고 꼬리로 몸으로 치고 다닙니다. 내가 저들을 해치지 않을 것을 아나 봅니다.

선한 것은 선한 것을 알아 본다는데 저는 그렇게 선한 인간도 아닌데 나를 스치는 많은 것들이 선하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앉았으니 차 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칡꽃 몇 개 떨어져 내립니다.

책에서 배웠습니다. 세상 어딘가에 무릉(武陵)이 있고 거기엔 도원(桃源)도 같이 있어 뭇 삶이 살기에 좋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술이 깨어 이 골짜기를 벗어나면 여기를 다시 찾을 수 없겠지요. 다시 찾을 수 없으니 무릉이 맞을 겁니다. 두 번 찾을 수 있다면 도원이 아닐테니까요.

우리는 모두 무릉에서 떠나 온 것이 맞나 봅니다. 떠나 간 것은 그립고 그리운 것은 다시 가질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나는 내가 떠나 온 무릉을 흘핏 조금이라도 봤으니 고맙고 고마운 일입니다.

집에 돌아 왔습니다. 소나기는 내리고 이불은 젖고 죽은 끓고 애새끼는 쳐울고 마누라는 집을 나갔습니다. 이제 다시 속세로 왔으니 애끓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우리에게 무릉은 영 먼 듯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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