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부농의 꿈을 담은 30년의 기록, 괴산 박호관 송덕리 이장
<11> 부농의 꿈을 담은 30년의 기록, 괴산 박호관 송덕리 이장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3.06.27 2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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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 충청인의 기록으로 본 시대읽기
흙과 함께 살아온 60평생… 돌아보니 '값진 인생'

농사 일지·부조금 가계부 등 30년간 보관
농산물 수입·자재비 등 상세히 기록

꼼꼼히 비교·정리한 자료 고소득 '한몫'
"초심 잃지 않는 것이 농사의 비법"

괴산 장연면 송덕리는 충북에서도 소문난 부촌이다. 100여 가구가 모여살며 고추와 대학찰옥수수, 절임배추 등 괴산 명품 농산물을 재배해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열한번 째로 만나볼 시민기록자 박호관 송덕리 이장은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 농사를 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농부다. 24살에 결혼해 지금까지 고향과 함께 한 박 이장은 80년대부터 농사 일지와 농사 메모지, 부조금 가계부 등을 꼼꼼이 기록하며 부농의 꿈을 키웠다.

박 이장의 농사 관련 가계부는 농사를 업으로 삼아 자신만의 농업 경영을 기록하고 정리한 자료다. 비록 혼자 농사짓고 수확하며 얻은 소득이지만, 주먹구구식의 셈법이 아니라 경영자의 마인드로 농사짓고 살림살이를 계획한 소박한 시간을 보여준다.

1986년부터 2013년 현재까지 27년간 적고 있는 농사일지와 가계부는 기록의 지속성에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농산물 판매물 가계부에는 1년간 벌어들인 농작물 수입과 농사짓는데 사용한 자재비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상세히 적어두었다.

30년 농가수입 기록을 살펴보면 1986년 1년 농사 수입이 260여만원에서 해마다 증가해 1990년 1천만원 시대를 열었고, 1993년에는 단기간에 두배의 소득으로 2천만원 대에 올라선다. 그리고 1998년에는 3천만원 소득시대가 열리는 듯했지만, 2002년 1천8백만원대로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다가 이듬해 4천3백여 만원의 고소득을 기록한다. 이후 조금씩 꾸준히 오른 농가 수입은 2009년 5천만원 대를 기록했고, 2011년에는 6천만원 고지에 다가가는 등 값진 땀의 결실을 보여준다.

힘든 농사일로 가계부 쓰는 일이 귀찮을 법도 하지만 박 이장의 남다른 기록정신은 농사꾼으로의 철학도 담겨있다.

박 이장은 “24살에 결혼해 25살에 살림을 나면서 농작물을 파종하는 시기를 알기 위해 농사일지를 쓰기 시작했다”며 “농작물을 계속 관찰하면서 일년에 드는 비용과 수입이 얼마인지 궁금해 적기시작한 것이 30여년이 다되어 간다”고 들려줬다.

이어 “농작물 시장이 확대되면서 소득도 높아졌는데 2002년은 IMF 영향이 길어지면서 농촌의 수입도 많이 줄어들었다”면서 “한 해 주요 수입원이 무엇인지를 적어두면 다음 해에 어떤 작물을 심어야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지 알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 해의 가계 수입이 적힌 마지막 장에는 그 해 지은 농산물 중 주요 수입원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입해 기록의 가치를 높여준다.

농가 소득에 효자 노릇을 한 농작물을 살펴보면 1987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벼 수매와 고추, 누에고치, 마늘, 호박 등의 비중이 컸다면, 1990년 이후에는 옥수수와 흑미, 백하수오 등 특용작물이 고수익 농작물로 진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중 고추는 30여년 농가소득의 효자 품목으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어 괴산이 명품 청결 고추의 고장임을 증명하고 있다.

박 이장은 “80년 대에는 양잠업이 농가에 고소득을 보장했다”며 “당시 가덕교육장에서 양잠교육을 받고 누에를 키웠는데 4남매와 누에고치를 같은 방에서 키웠다”고 회고했다.

또 “뽕나무를 쌓아두면 누에가 밤새 하얗게 고치집을 지어 쳐다만 봐도 뿌듯했다”면서“양잠업으로 논과 밭을 샀는데 90년대 양잠업이 사양길로 접어 들어면서 대학찰옥수수로 전환해 농가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가계부에는 적금과도 같았던 소값도 적혀있다. 1989년 80만원이던 송아지 판매가격은 1995년 189만원, 1996년 135만원으로 ‘소 한마리가 대학 등록금’이라던 옛 말을 실감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조금 가계부도 흥미를 끈다. 박 이장이 1985년부터 지금까지 27년간 결혼과 부고, 회갑 등에 부조한 총액은 2천5백8십42천원으로 집계돼 독특한 두레공동체 문화도 살펴볼 수 있다. 부조 내역을 세부적으로 보면 1985년에는 3000원인 반면, 1986년에는 5000원, 1990년에는 1만원, 1995년에는 2~3만원이다가 1997년에는 5만원으로 껑충 뛴다. 그러다 IMF로 3만원이 대세를 이루다 2010년 이후에는 5만원으로 상향돼 물가상승 폭도 감지할 수 있다.

긴 시간을 하나로 모은 듯한 박 이장의 기록들은 평범하지만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아가려는 소시민의 당당한 기록이기도 하다.

박 이장은 “결혼 후 27살 때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려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도시로 직장을 구해나가면서 농사로는 돈을 벌수 없을 것 같았다”며 “27살에 광산에 취업을 하려고 원서를 냈다가 떨어지면서 남보다 논밭을 사서 윤택하게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고향에 뿌리를 내렸다”고 말했다.

그렇게 60평생 흙과 함께 살면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아도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시골에서 순한 양같이 살았다”는 박 이장은 “농사짓는 게 쉬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나이에 1년에 5천만원 이상의 소득을 벌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농사도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농사 철학을 들려줬다.

◈ 박호관씨(66)

1947년 충북 괴산군 장연면 송덕리 출생. 24살에 결혼해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평생 고향에 뿌리박고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80년 초부터 매년 기록한 농사판매 가계부에는 농가소득원과 농작물 변화상을 알 수 있고, 부조금 가계부는 결혼과 부고 등에 따른 공동체적 관계도 엿볼 수 있다. 현재 송덕리 마을 이장을 맡고 있으며, 고추와 옥수수, 배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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