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962년 제주도 무전여행을 기록한 옥천의 안후영씨
<10> 1962년 제주도 무전여행을 기록한 옥천의 안후영씨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3.06.20 1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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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 충청인의 기록으로 본 시대읽기
설렘·두려움 가득했던 여행길… 지금은 아련한 추억

1962년 제주도 무전여행 기록 옥천의 안후영씨

24일동안 쓴 기행문 ‘처녀’… 젊음의 패기·도전 정신 담겨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제주도의 아름다움 등 상세히 기록

육여사 부친 장례식·박근혜 대통령 옥천 방문 사진 '눈길'
자작시·편지글·일기·사진·명언 등 역사적 가치있는 자료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지원은 1780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해외 여행길에 나선다. 조선 사신 대열에 합류해 중국 북경길에 오른 박지원이 당시 신세계와 같았던 중국 곳곳의 표정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는데, 바로 ‘열하일기’다. 

‘열하일기’가 18세기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 문명의 조우였다면, 옥천 안후영 옥천 향토사 연구회장이 1962년 제주도 무전여행을 기록한 24일간의 기행문 ‘처녀’는 젊음의 패기와 도전을 엿볼 수 있는 일기다.

51년 전, 동네 형 양성일씨가 감행한 무전여행은 1962년 1월 12일 시작해 29일까지다. 20대로 진입하며 여행길에 오른 안 회장은 기행문 첫 줄에 “오늘 출발할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 조바심에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청춘이라는 네테루가 붙어있기 때문에 이런 꿈도 꾸워보는 것인 줄 믿는다” 며 각오를 다진다.

무전여행을 계획한 모습도 꼼꼼히 적혀있다. 돈없이 떠나는 길이니 오고가며 몸을 의탁해야 할 주소 명록에는 지인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또 추운 겨울에 떠나는 제주도 행이라 파카와 워커, 배낭을 동네 친구에서 빌리고, 아버지 몰래 가는 여행길이라 여비 마련이 신통치 않아 친구에게 3500환을 꾸는 과정이 상세히 적혀있다.

그런가 하면 학생에서 사회인이란 교차점에 선 청년이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은 ‘나는 아직 좁은 옥천의 거리뿐이 모른다. 바다라는 광막한 대 바다를 아직 보지 못한 못난이다. 부모님께 말씀도 하지 않고 떠나는 못난이는 어떻겠느냐(1월 12일)’라는 글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무전여행을 시작하며 설렘 속에 두려움도 가득하다.

‘12시 50분 급행의 소리가 들린다. 옆으로 빠져나가서 탈 꿍심으로 나갔다. 조마조마하는 불안이 휩쓸고 있다. 열차가 쉬어있다. 마구 뛰어가서 배낭을 들어 얹었다. 금방 차장이 뛰어와서 붙잡는 것 같았다.(1월 13일)’

안 회장은 “당시 무전여행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이었다”며 “아버지께서 알면 혼낼까봐 말도 못하고 한살 위인 동네 형과 무작정 열차를 타고 제주도까지 가게 됐다”고 회고했다.  

이어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해 제주도도 한 시간 거리지만 1960년 당시 제주도는 신혼여행조차 갈 수 없는 먼 곳이었다”면서 “옥천에서 열차를 타고 가다 대구에서 내려 경주를 둘러보고 부산에 가서 배를 타고 꼬박 하루 걸려 제주도에 도착했다”고 들려줬다.  

어렵게 도착한 제주에서의 첫날은 영화감상을 시작으로 사굴과 목장, 성산포일출봉, 정방폭포, 천지연폭포, 모슬포, 관음사 등을 밟는다.   

‘눈밭길을 걷고 걸어 눈보라를 맞으며 간 곳이 사굴, 즉 뱀굴이란다. 굴이 매우 크게 보였다. 제일 큰 굴로 들어가 본다, 솜뭉치에다 석유불을 켜고 들어간다. 기차굴같이 멋지게 들어가다가 굽어져 있다. 검정으로 입혀 있다. 맨 돌고드름이다. 뾰죽한 돌들이 있었다.(1월 19일)’

‘천지연폭포수로 가는 길에서의 일들이었다. 조그마한 발전소를 지나서 보니 그곳이 폭포수였다. 어느 웅변가의 연습소리가 우렁차다. 우리가 가니 멈추었다. 파란 물이 선하다, 위위 돌의 자태 나무들의 아름다움이 더욱 폭포수를 어울리게 하고 있다.(1월 21일)’

'참혹했던 비극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 1948년 4·3제주사건에 대해 4·3 사건을 물었다. 공산당 즉 반공분자색출 사건이라고 한다.(1월 21일)는 언급도 적혀 있다.'

안 회장은 “국제도시로 성장한 제주도는 50여년 전 원시적인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며 “스무살에 감행한 무전여행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커졌다”고 미소지었다.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안 회장은 고향에서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젊어선 옥천JC회원으로, 퇴직 후에는 작가로, 향토사를 연구하는 위원으로 활동하며 지역과 함께 삶터를 깊이 뿌리내렸다.


안 회장의 다양한 활동은 사진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중 향수의 시인 정지용과 육영수 여사의 고향인 옥천답게 빛바랜 사진 속에는 육 여사의 부친 장례식 장면과 딸 박근혜 대통령의 옥천 방문 모습도 흥미를 끈다. 이외에도 1978년 집을 건축하며 든 비용을 기록한 건축가계부, 해군 생활 사진, 옥천 중학교 동창회 모임을 주도하며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동창 회비를 기록한 노트도 재미있다. 39명의 동창들이 1967년 낸 동창회기금은 3만5천650원이 1979년에는 21만3천275원으로 정리돼 인수인계했다.  

안 회장은 “옥천에서 예술 분야로 다양하게 일을 하다보니 자료가 많다”면서 “기록이란게 별거 아니지만 버리지 않고 간직해 후배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료의 귀중함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양식 충북학연구소장은 “안후영씨는 글쓰는 일을 즐겨했던 것같다”며 “1962년 전국 여행 중 작성한 기행문과 1963년 해병대에 근무할 당시 자작시, 편지글, 일기, 사진, 명언, 신문기사 등을 모아놓은 스크랩북 등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옥천 모습을 볼 수 있어 의미있는 자료다”고 자료적 가치를 들려줬다.

◈ 안후영씨(70)
충북 옥천 출생으로 고향에 뿌리내리고 문인으로, 향토사 위원으로 지역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 9급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옥천 도서관장으로 1999년 정년 퇴임했다. 이후 옥천 문인협회 회장, 옥천예총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옥천 향토사 연구회 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옥천군향토유적보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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