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팔순이 넘은 어머니에게 이젠 아버지 욕을 듣지 못한다
<6> 팔순이 넘은 어머니에게 이젠 아버지 욕을 듣지 못한다
  • 김선영 <소설가>
  • 승인 2013.05.21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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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보금자리 가족을 찾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했을까?

김선영 <소설가>

가족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살기가 팍팍해도 가족이 있어 힘을 내고, 가족이 있기에 인생의 파고도 헤쳐나갈 수 있다. 그러나 가정폭력, 노인학대, 이혼 등 각종 사회 문제가 야기되면서 가족이라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실종되고 있다. 이에 충청타임즈는 지역 작가들과 독자들이 외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어머니는 마흔 둘에 혼자 되셨다. 나는 어머니가 혼자되신 그 나이를 어느새 훌쩍 넘겼다. 자식 낳고 살아보니 혼자 된 젊은 어머니의 막막한 심정이 가없이 사무쳐 온다. 나는 자식을 둘 낳았고 어머니는 다섯을 낳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에게는 여섯 살 막내부터 세 살 터울로 열여덟 맏이까지 딸 자식, 다섯이 있었다.

그 해 어느 날, 냇둑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처진 어깨와 어머니의 조붓한 등이 한없이 망연해 보였다. 연보랏빛 한복이 시나브로 땅 속으로 꺼져들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아홉 살 나는 어머니께 달려가지도 다가가지도 못한 채 어머니가 내를 건널 때까지 숨어서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슬픔과 맞닥뜨리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어머니가 치마말기를 잡고 묻은 흙을 훌훌 털며 내를 씩씩하게 건넜으면 싶었다. 아니 어머니는 그래야 한다고 나는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다.

그 주문이 통했던 것일까.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 욕을 하며 내내 씩씩하게 사셨다. 딸들의 작은 허물에도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호통을 치며 잘잘못 가리지 않고 빗자루 타작을 했다. 어머니의 응어리 진 삶을 두들겨 패듯 그렇게 딸들에게 매를 휘둘렀다. 난리통 끝에는 항상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푸달진 원망이 따라 붙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무척 싫어하는 줄 알았다. 어머니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딸 다섯 키우기 겨울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온갖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딸들은 외려, 돌아가신 아버지를 동정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욕설을 사방에 부리는 어머니를 보며 너무한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줌 뼈로 땅 속에 누워 계실 텐데, 무슨 힘이 있으며 그것이 무슨 소용이 닿겠나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머니가 채반 가득 전을 부치고 계셨다. 명절도, 아버지 기일도 아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머니께 여쭈었다. 어머니는 대꾸도 없이 손놀림만 바쁘게 움직였다. 심상치 않았다. 곧 불호령이 떨어질 기세였다. 눈치를 보며 살살거리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너희들이 뭘 알어, 이년들아. 오늘이 느이 아부지 환갑여. 알기나 알어?”

해마다 청명 때 성묘를 가곤 하는데 그때마다 가장 늦게까지 아버지 산소를 떠나지 않는 분도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손끝이 까매지도록 봉분에 난 잡풀을 뽑았다. 이제 그만 가자고 재우쳐도 잡풀을 뜯으며 해빙기 들뜬 흙을 주름 진 손으로 꾹꾹 눌러 다독였다.

“이놈의 물곳은 파내도 파내도 끝이 없어. 얘, 저기 저 줄딸기 순 얼른 뽑아버려야 햐, 안 그러면 금방 느이 아버지 산소 다 감을 겨.”

며칠 있으면 아버지 기일이다. 그때 어머니께 슬쩍 여쭤봐야겠다.

“엄마, 아버지를 사랑하긴 한 거유?”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어머니는 눈을 하얗게 흘긴 뒤 픽 웃으시며, 니년들이 뭘 알어, 하실 거다.

어머니도 이제 팔순이 넘었다. 아버지와 같이 산 몇 배의 시간을 혼자 사셨다. 이젠 아기처럼 둥그렇게 순한 얼굴이 되셨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입에서 아버지 욕을 듣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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