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관은 건강한가
우리 역사관은 건강한가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3.05.20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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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보은·옥천·영동)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내달라”.

1591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통신사를 통해 선조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요구했다. 사실상 자신의 침략전쟁에 군량을 대라고 한 셈이었다.

토요토미는 이 같잖은 요구가 거부되자 이듬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아베 일본 총리는 “침략에 학술적 정의는 없다”며 “국가간 시각 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겐 임진왜란도 ‘길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야박하게 거절해 무력으로 지나갔을 뿐 침략은 아닌 것’이 된다.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는 아예 “일본은 2차대전에서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고 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이 침략이 아니라고 우기면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 위정자들의 그릇된 역사관을 당당하게 나무랄 수 있는가. 그제 광주민주화운동 기념행사가 반쪽으로 치러지는 것을 보며 가진 의문이다. 이 땅에서도 여전히 역사 왜곡이 시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올해 5.18 기념식을 앞두고는 때아닌 ‘북한군 개입설’이 터져나왔다. 일부 종편방송에서는 정체불명의 인물의 입을 빌어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당시 광주에 침투해 모종의 공작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5.18과 관련한 수사와 재판이 있었고 국회 청문회도 열렸지만 한번도 공식 제기된 적이 없는 주장이었다. 불을 댕긴 것은 보훈처였다.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금지하며 악의적 시도가 스며들 틈새를 만들어 준 것이다. 대학가에서 5·18 사진전이 훼손되고, 기념 대자보가 철거되기도 한 것은 이런 부채질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굳이 5.18을 북한과 결부시키고 싶었다면 최소한의 사실관계는 바탕에 깔고가는 성의를 보였어야 한다. 이렇게 말이다. 5.18 발발 반년전인 1979년 12월 12일 전방의 한 사단장이 철책을 지키던 연대 병력을 서울로 빼돌렸다. 친목계를 하던 모교 동기 및 선·후배들과 구국의 결단(계원들을 제외한 대부분 국민들은 ‘쿠데타’라고 부름)을 내린 것이다. 당시 병력 철수로 구멍이 뚫린 철책으로 북한군 1개 대대가 침투했다. 이들은 신통력을 발휘해 반년 후 광주에서 민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산중에 매복해 있다가 폭동에 개입했다. 그럴듯 하잖은가.

공감을 얻으려면 당시 부대를 빼돌린 사단장 한명 정도는 희생시켰어야 한다. 비록 구국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대규모 침투를 방조한 전 사단장이자 나중에 대통령을 지내기도 했던 그 양반에게도 광주폭동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웃자고 한 얘기지만 청소년들이 이런 방송을 보고 오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섬뜩해진다.

고3 수험생들이 수능에서 ‘국사’를 선택하는 비율이 해마다 줄어 지난해에는 6.9%로 떨어졌다고 한다. 서울대만 인문계열 응시생의 수능 필수과목으로 정한 데 따른 현상이다. 대입결과에 목을 매는 고등학교에서 입시에서 홀대받는 국사를 제대로 가르칠리 없다. 별도 교과서로 교육하다 한국사로 통합한 근·현대사는 말할 것도 없다.

국사 교육이 부실하다보니 청소년들이 ‘위키피디아’ 같은 온라인 사이트에 돌아다니는 왜곡된 정보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이 사이트의 5·18에 대한 왜곡은 심각하다. ‘김대중의 사주로 일어난 좌익 빨갱이들의 폭동’이라고 한 대목까지 눈에 띈다. 우리는 건강한 역사관을 유지하고 있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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