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삶의 막다른 곳에서 누군가 있어주길 고대했던 어머니
<5> 삶의 막다른 곳에서 누군가 있어주길 고대했던 어머니
  • 반숙자 <수필가>
  • 승인 2013.05.19 21: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따뜻한 보금자리 가족을 찾자
외롭게 한 罪

반숙자 <수필가>

오늘로 어머니 가신 지 일주일이다. 땅거미 내리는 시각, 식탁에 수저를 세 벌 놓고 “ 진지 드세요…” 하다가 멍하니 선다.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하는 순간 가슴으로 스산한 바람이 인다.

96년 동안 깔끔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다. 임종 전날까지 혼자서 화장실을 가셨다. 장롱이며 서랍장이며 반듯하게 정리해 놓고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 신부님을 청해서 병자성사까지 받고 하루하루 죽음을 준비하시는 눈치였다.

근년에 들면서 나는 새벽이면 제일 먼저 어머니의 문안을 받았다. 연세가 높아지면서 아기상태로 되돌아가는지 나를 보고 엄마라 하고 새벽이건 밤중이건 방문을 열고 엄마가 있나 없나 확인하는 일이 일과였다.

작년 봄만 해도 농장에서 풀을 뽑는다고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섰다. 식사를 잘하시니 기운이 나서 심심해서 그러려니 했다. 아래 밭에서 일하다 올라와 보니 꽃밭의 풀꽃들을 다 뽑아버렸다. 엄마가 게을러빠져서 꽃밭을 풀더미로 만들어 놓았다고 꾸중을 하였다. 에미라는 호칭이 엄마로 바뀐 것도 그 무렵이다. 그때서야 어머니에게도 치매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한밤중에 전기 불을 켜놓고 가버리고 책상위의 원고청탁서며 보다둔 책이 없어졌다. 꼭 미운 일곱 살 아이들이 장난치는 모습이었다.

이런 어머니와 날마다 아침이면 실랑이를 벌였다. 눈치는 빨라서 며느리가 양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나갈 때면 “언제 와?” 하며 배웅을 하고 작업복 차림이면 농장에 가는 줄 알고 따라간다고 앞장을 섰다. 그러면 우리 내외는 눈을 꿈적거리며 다른 핑계를 대고 몰래 빠져나갔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장에 가는 엄마를 따라가고 싶어 안달을 하던 그 모습이다. 농장에 가면 일 저지레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누구 하나는 어머니를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형벌 같은 외로움이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노인정에 모셔다 놓아야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 같으니 싫다 하고 텅 빈 아파트에 혼자 남아서 아들 며느리가 돌아올 때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셨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사람이 그리워서 나를 찾는 줄 알았다. 명절 때 손자들이 모여와서 집안이 북적거리는 날에도 내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 어디 갔느냐고 수도 없이 손자들에게 묻는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당신에게는 오로지 며느리만 보였는지 모른다.

이런 어머니가 내게는 혹이었다. 70이 훨씬 넘은 아들과 70이 가까운 며느리가 노모에게 매달려서 불안 속에 살자니 속에서 불덩어리가 끓을 때가 왜 없겠는가. 참다못해서 지난 7월에는 남편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러시아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일주일을 보내고 현관에 들어섰을 때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 수상기에 큼지막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에미는 소련 갔어요, 더 찾지 마세요.” 남편의 글씨다. 하루에도 수백 번 물어서 대답할 기운이 빠졌단다. 생각다 못해서 이렇게 써서 붙여놓고 물으시면 손으로 가리키고, 읽어보시고 잊어먹고 또 물으시고…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날은 저물고 시장기는 드는데 엄마는 보이지 않고 얼마나 막막하였겠는가. 잘 모시나 못 모시나 함께 있어드린다는 것만도 큰 효가 되는 것을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해도 엄마만 내 곁에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던 어렸을 적 기억이 나면서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이를 먹으면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간다. 말과 행동이 단순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이 오로지 자신만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자신마저도 잃어버려 우주의 미아가 되어 홀로 떠나간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오래 써서 남루해진 육신을 벗어놓고 떠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의 흔적을 지우느라 바쁘다. 물리적인 흔적은 차츰 없어지고 남는 것은 그 사람 행위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분은 삶의 굽이굽이에서 나눔의 사랑과 지혜를 일깨워 주려고 하느님이 내게 보내주신 성모님이 아니었을까 싶다. 양말 두 켤레만 선물 받아도 한 켤레를 꼭 내게 주셨고 푸성귀 한 다발도 이웃과 나누시던 분이다. 대소가의 아프고 서러운 일은 혼자서 삭히셨고 시골에서 상경하는 친인척들 침식수발로 청춘을 보내셨다.

근 일세기를 살아낸 어머니는 아주 작아져서 주방으로 나올 때도 아기처럼 엉금엉금 기어 나오고 임종하는 순간에도 내 손을 꼭 붙잡고 “엄마, 엄마” 불렀다. 도대체 어머니와 나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길래 이씨 문중에서 만나 젊어서는 온갖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돌아가실 때는 당신이 아이가 되어서 내 품에서 임종을 하셨는지 알 수가 없다.

고부간이라는 인연이 어머니와 나 사이를 질기게 묶어주었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같은 여자라는 동질감이 40여년 세월을 연민하며 미워하며 또 사랑하며 이어오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영영 떠나시고 난 후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은 어머니를 외롭게 한 죄다. 삶의 막다른 낭떠러지기 앞에서 누군가 옆에 있어주기를 고대했을 어머니, 그 누군가가 있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을 어머니를 외롭게 한 죄, 내 어찌 다 용서받으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