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을 이장 10년, 35년 간의 기록 속에 비친 역사, 서병종씨
<5> 마을 이장 10년, 35년 간의 기록 속에 비친 역사, 서병종씨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3.05.09 1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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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 충청인의 기록으로 본 시대읽기
소박한 꿈 꾸던때가 엊그제… 세월에 떠밀려 어느새 황혼

35권의 일기장, 꼼꼼한 성격에 케이스까지 고스란히 보관
박정희 대통령 서거부터 담뱃값까지 … 소소한 일상 기록

최근 '설계리농요보존회' 결성 … 우리의 소리 보존에 앞장
평범한 삶 속에 녹아난 대한민국 역사의 단면을 엿보다

소시민의 기록은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국가적 대·소사 보다 주변의 일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민기록자 서병종씨의 일기장은 소시민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다. 1978년부터 2013년 현재까지 씌여지고 있는 일기는 1년을 1권의 노트에 담아 35권에 이른다. 착실한 농부의 곳간처럼 지난 시간을 쟁여 놓은 35권의 일기장은 그 만큼 낡은 책장에 차곡차곡 저장돼 있었다.

오랜 시간을 들추듯 35년의 하루가 오롯이 담긴 35권의 일기장은 각 연도별로 꽂혀 있었고, 일기장 케이스까지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어 차분한 성품과 매사 꼼꼼한 성격이 기록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어르신의 일기장은 크게 3가지 시선에서 주목을 끈다. 첫째는 국민 스스로 통치자를 뽑을 수 있도록 직선제가 실시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다. 국가의 일꾼을 뽑는 주권 행사에 대해 평범한 국민들의 기대감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마을 이장을 맡았던 어르신의 일상이다. ‘동네 주민 여러분!’을 시작으로 낡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장의 목소리도 기록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영동은 충북의 관할임에도 모든 생활권이 대전으로 통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 소시민의 기록 속에서 엿본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

날짜가 정확한 기록에서 가장 먼저 찾은 것은 국가의 대·소사에 관한 기록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이후 실시된 대통령 국민투표, 국회의원 선거 등은 권력의 변방에 있던 국민들의 정치 체감온도와 주권 의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록은 흥미를 끌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나면서 국가 비상사태에 돌입한다. 중앙에선 권력 암투가 치열하게 전개될 때지만 어르신의 당일 일기장엔 ‘이장단 선진산지 시찰’이 적혀있고 27일까지 경주 일원을 방문한 것으로 돼 있다.

사건이 발생한지 3일만인 10월 28일 일기장에서야 ‘태극기가 모자라 구해다 주고 밤에 박정희 대통령 빈소에 분향하러 서명종, 문점식, 손성중, 손무정, 이영네 모, 영상모, 진명국 모, 방호덕 둘째사위 갔다오다’(1979.10.28)라고 적고 있다.

서거 이후 마을 사람들을 인솔해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서울 박대통령 묘소. 성묘 및 분향 41명. 국회의사당에서 점심까지 대접받다. 이** 비서의 안내로 본회의장 관람. 현충사 박물관과 온양온천에서 목욕. 용산 지나 황간 못 와 수식이 앞 송천식당에서 저녁식사. 800원. 11시경 도착’(1979.11.20)

어르신은 “당시 10만원을 주고 대형버스를 빌려 마을 사람들과 박정희 대통령 묘소가 있는 국립묘지를 참배했다”면서 “저녁 늦게 돌아온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낸 기록도 있다. ‘오전에 투표하고.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다. 이제 새로운 세상을 펼쳐질 것을 기대해 본다. 참으로 원을 풀게 되었다.’(19 97.12.18. 청)는 말로 변혁을 갈망하는 마음도 확인할 수 있다.

◇ 설계리 이장의 하루

1978년 1월 1일 기록에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 화합을 당부하는 마을 이장으로의 방송 글도 있다.  

일기 앞자락에 ‘방송’이라고 적은 글은 ‘지난 77년은 여러가지 어려웠던 여건 속에서 동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대소사를 대략 마무리 짓고 새해에는 새마음 새뜻으로 더욱 노력하여 새 설계를 펼쳐 슬기롭게 이뤄나갑시다.’(1978.1.1) 라고 독려해 생생하고 풋풋한 마을 정경이 그려진다.

또 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한국정서를 대변해주듯 1978년 5월에는 노인 경로잔치도 열렸다. ‘오늘 경로회관에서 남녀 70세 이상 노인들을 모시고 임한영씨와 영동 읍장 배정혁씨가 주관하여 노인잔치 하는 날입니다. 70세 이상 남녀노인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사오니 어려이 생각지 마시고 꼭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1978.5.27)라며 방송했던 기록도 있다.

이외에도 마을 지도자로 활동하며 주민조사를 실시한 것과 1980년 새마을 전진대회에서 군수상을 타 부상으로 받은 탁상시계(1980.2.13), 독립기념관 건립 성금 모금(1982.11.19)도 눈에 띈다.

어르신은 “마을 이장 10년을 하면서 아내가 많이 힘들었다. 농사도 지어야 하는데 새마을 사업한다고 강가에 가서 모래 파오고, 회관으로 밥 해다 날랐다”면서 “당시에는 이장이 농약까지 배분하고 연말에 값을 계산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 생활권으로 본 기록

영동을 포함해 보은·옥천 지역의 생활권은 청주보다 대전에 중심을 두고 있다. 거리상 대전이 훨씬 가깝기도 하지만 자녀들 진학이 대전의 학교로 형성되면서 영동은 대전 생활권으로 편입되었다.

어르신의 기록에도 ‘대전 시실 서원도씨 딸 여우는데 갔다.(1979.11.18), 영태가 와서 거들고 5시에 대전보내다(1989.10.15), 오늘 9콘티(12관) 따서 대전보내다.(1989.10.10)’등 많은 일기에서 대전이 거론되고 있다.

세월은 강산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농사품목도 담배에서 포도로 바뀌었다. 1970년대 담배농사가 부농의 꿈었이라면 현재는 포도농사다. “담배 1포대면 송아지 한마리와 같았을 정도로 큰 돈을 벌었는데 어린 4남매가 일손을 도왔다”는 어르신은 “농사일에, 이장일에 참 바쁘고 힘들게 살았다”고 들려주시다 울컥 눈물을 보이셨다.

이처럼 35년 기록 속에 비친 서병종 어르신의 하루는 개인의 일상이기도 하지만 소시민들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작은 실핏줄이 삶의 현장을 구석구석 흐르다 강물을 만나듯 소소한 일상이 역사로 기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민식 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은 “서병종씨의 기록물을 보면 소시민의 일상이 자세히 적혀있다”며 “특히 국가적 큰 사건을 접한 국민들은 사건 발생 당시보다 체감 속도가 늦은 것을 알 수 있다”며 “이는 삶과 무관한 것도 있고, 삶의 현장에서 받아들이는 정치의 민감도나 관심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일 수 있음을 일기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기록의 의미를 부여했다.

◈ 기록물

-오늘은 12대 국회의원 선거일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6투표구 최극 이용희 박준병 이동진 후보 투표율. 영동군 투표율 54.7% 전국 2등. 전국 투표수 1등 김종호 67%.(198 5.2.12.청)

-오늘은 국민투표일 7시부터 시작. 추운 날씨에 햇살이 퍼지기 전에는 모두들 떨었다. 낮에는 대단히 따시다 평화롭게 투표 마치고 투표율 98%될 것 같다. 어제 밤 첫서리 내려 고추 다 버리다.(1980.10.22.)

-투표하다. 20일 동구방면 다니며 선거운동하다. 22일 선거운동. 23일 선거운동. 26일 밤 7시 박준병씨 당선만찬회 동양갈비서 하다.(1992.3.24. 청,구름)

-오늘은 대통령 선거, 아침에 미건 치료받고 투표하고… 밤 새벽 1시까지 테레비보다 노무현당선 1,200만 57만 표 차이나다(2002.12.19. 청)

-폭발물 보는 사람 만지지 말고 신고하고 65세 이상 노인 국립공원 무료 입장합니다.

-이장단 선진산지 사찰 6시 30분 출발 천마총-불국사-박물관-보문단지-포항제철-보경사 후 27일 귀가 1979.8.26

◈ 서병종씨

1932년 충북 영동 설계리 출생. 20대 후반 고향에 정착한 뒤 안옥임씨와 결혼. 7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 진행될 즈음 이장을 맡아 마을 일을 했으며, 지역에서 전해지던 ‘설계리농요’(충북도무형문화재 제6호)를 복원해 1996년 설계리 농요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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