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과 찬합
김밥과 찬합
  • 정규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 승인 2013.05.02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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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내가 지금은 초등학교인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운동회가 주로 가을에 열렸다.

만국기가 운동장 하늘 높이 내걸리고 청군과 백군으로 편을 갈라 뜀박질과 공굴리기, 오재미라는 모래주머니를 던져 박을 터트리면 나풀거리는 꽃종이와 ’체력은 국력’ 등의 만장이 어찌나 신이 나는 장면이었는지.

따지고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할 일, 즉 공부를 하지않고 교실에서 벗어나는 것 만으로도 즐겁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가슴설레며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집에서 날라다 주는 푸짐하고 풍성한 점심식사 였으니, 그 당시 운동회날에는 3단 또는 4단이상의 높은 찬합에 어머님이 싸들고 오는 맛있는 음식이 군침을 꼴깍 넘어가게 했다.

찬합에는 맨 위칸에 넘치도록 하얀 쌀밥이 담기고, 그 아래에는 불고기며 계란말이 등 당시 평소에는 쉽게 먹어보기 힘든 산해진미가 즐비했을 뿐만 아니라 달작지근하고 시큼한 온갖 과일까지 담긴 맨 아랫칸에 이르면 행복은 파란 가을 하늘로 마구마구 퍼져 나가는 듯 했다.

그 당시 운동회는 말그대로 마을의 큰잔치였는데, 높은 교단 옆 천막아래에는 마을의 높으신 분들이 근업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 앞에는 무슨무슨 기관장 ’증’이라는 하얀 종이가 붙은 푸짐한 선물이 전의를 부추기기도 했다.

운동회날에는 또 운동장 한구석에 높다란 차양을 치고 국밥집이 차려지기도 했는데, 고깃국이 아쉽기만 했던 그 시절 가마솥에는 펄펄 끓으며 퍼져나오는 하얀 김에 배어있는 구수한 냄새는 어린 나의 후각은 물론이려니와 발걸음마저도 쉽게 옮기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때 쯤으로 기억되는데, 운동회날 어머니 대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큰누나가 찬합이 없는 빈손으로 점심시간에 맞춰 운동장으로 찾아왔다.

큰누나는 올망졸망한 어린 동생들을 국밥집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번 운동회 점심은 국밥으로 때우자는 것 아닌가. 국밥집 앞을 지날 때마다 침을 질질 흘리곤 했던 어린 나는 "이건 웬 횡재?"라며 그 뜨거운 국밥을 먹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 모습을 보던 작은 누나는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고, 큰누나는 가만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전 날 아버님과 어머님이 크게 다투신 뒤, 그만 어머니께서 친정으로 피신하게 된 위기가 집안에 찾아 온 사정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허벌나게 국밥을 먹던 어린 내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그래도 맛에 대한 기억은 참으로 오묘해서 그 쓰린 사정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고이곤 한다.

가을 운동회가 찬합이라면, 봄 가을 소풍은 김밥이 주 메뉴였다. 김에 들기름을 바르고 단무지와 시금치, 당근, 볶은 쇠고기(요즘 김밥의 주요 재료인 햄종류는 당시엔 구경할 수도 없었다)와 달걀부침으로 맛을 낸 김밥은 맛도 맛이지만 색깔 마저도 황홀했다.

얄팍한 나무도시락에 가지런히 김밥을 담고, 또 삶은 달걀과 사이다 한병이라도 더하게 되면 소풍길의 발걸음은 날아갈듯 했다.

운동회날 점심이 찬합으로 차려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몸을 많이 쓰는 행사이므로 배를 든든하게 채워줄 요량이 작용한 듯하다. 평소에는 좀처럼 맛보기 쉽지 않은 산해진미로 찬합이 넘치도록 차려지는 이유도 이런 연유와 함께 여럿이 나누어 먹는 즐거움까지도 포함됐으리라.

반면에 소풍날 가벼운 일회용 나무도시락에 김밥을 정성스럽게 싸주는 이유는 풍부한 영양을 고려함과 동시에 이동에 따른 편리한 휴대성이 강조됐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 1일 근로자의 날에는 많은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이날 학교 주변은 부모들이 몰고 온 자동차로 혼잡스럽기 그지없던 것이 예전과는 달라진 풍경일 테다.

놀라운 것은 운동회에 찬합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운동장을 빙 둘러 천막은 쳐있으나, 정작 그곳에서 찬합에 싸온 점심을 먹는 가족은 극소수일 뿐.

오히려 학교 주변 짜장면집 등 그럴듯한 식당은 운동회날 줄을 서서 기다리다 점심을 때워야 하니 추억 하나가 고스란히 사라진 셈이다.

찬합에 음식을 담는 정성이 그립다. 그런 음식을 추억하지 못한 채 메마르고 있는 어린이들의 정서는 또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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