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농의 꿈이 담긴 농사일기, 연규삼씨
<3> 영농의 꿈이 담긴 농사일기, 연규삼씨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3.04.25 1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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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 충청인의 기록으로 본 시대읽기
빛바랜 일기장, 농사꾼의 고단했던 삶을 기억하다

1965년~2010년까지 쓴 일기장
물가·품삯·수매가 등 소상히 기록
"배우지 못한 恨 글쓰는 것으로 위안"
2005년 시민기록물 전시에도 출품
평범한 기록 역사의 큰 물줄기로 남아

40여년 농사일기를 써온 연규삼씨를 만나러 도안 노암리로 가는 날, 들녘에는 밭고랑이 만들어지고, 모종을 심기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비록 사람은 볼 수 없어도 갈아엎은 땅과 비닐이 씌워진 밭고랑에서 농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평생 농사를 업으로 삼은 연규삼씨 역시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시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도착한 노암리지만 정작 연규삼씨는 뵐 수 없었다.

아내 정진애씨는 “남편은 3년전 폐암으로 돌아가셨다”며 “살아 생전 매일 매일 기록하고 일기를 썼는데 아마 살아계셨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좋아하셨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남편이 죽은 후 세간살이를 정리했지만 살아 생전 쓴 일기나 농사일기, 군대 편지는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보관하고 있다”며 “농사일기는 20여권이 되는데 27살에 결혼하고 고향에 정착하면서 쓴 것”이라며 보여줬다.

책장에는 검은색 표지로 된 노트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1965년부터 쓰기 시작해 2010년 돌아기시기 전까지 쓴 일기장은 주인을 대신해 농부로 살아온 삶을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었다.

빛 바랜 일기장은 1965년 12월 14일부터 시작되었다. 일기장 첫 페이지에 일기를 쓰는 이유에 대해 연규삼씨는 “첫째, 일기를 씀으로써 과거의 일을 되돌아 볼 수 있다. 둘째, 어제의 잘못을 반성하며 좀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 셋째, 과거의 슬픈 일들을 웃음으로 넘길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차곡 차곡 결실을 쌓아 둔 농부의 곳간처럼 일기장에는 농부의 일과는 물론 당시의 농사 관련 물가나 품삯, 수매가 등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들일로 하루를 마감하는 농사꾼의 고단한 일상이 그려진다. 그런가 하면 농사를 짓기 위한 농약값이나 시골장보기의 금액도 가늠할 수 있는 기록도 보인다.

농약 사용이 일반화 되면서 물가 비교도 가능하다. 현재 후라단 1봉에 3500원 정도고 키타진의 경우 1병에 7000원 정도이니 1978년 보다 현재의 물가가 5배 이상은 오른 셈이다. 고추 역시 물가에 따라 들쭉날쭉하지만 보통 1근에 15000원 정도니 당시보다 6배 가량 비싸졌음을 알 수 있다.

아내 정씨는 “농사기술이 발달하면서 남편은 모종을 여러 개 심어 어떤 품목이 농사짓기 좋은지 실험도 하고 관찰하면서 농사지었다”면서 “살아 생전 농사짓는 것이나 자식들에게도 꼼꼼하고 자상한 성격이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기록하는 것에 대한 연규삼씨의 애정은 남다르다. 힘든 농삿일 뒤에도 늘 무언가를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 정신은 근검한 생활로 나타났다.

“일을 마치고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면 그날 있었던 일을 매일 기록했는데 종이 한장도 그냥 버리지 않고 앞뒤로 빼곡히 뭔가를 쓰고서야 버렸다”면서“배우지 못한 한을 책보고 글쓰는 것으로 위안을 삼은 것 같다”고 들려줬다.

남편의 일기 쓰는 모습이 싫치 않았냐는 질문에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라할 게 뭐 있냐”며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았다. 아이들도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손자들도 초록색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무척 따랐다”고 말했다.

연규삼씨가 세상을 뜬지 3년. 아내 정진애씨는 남편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기록물들이 걱정이다.

“마을 이장을 맡아 해서 서류도 많고, 군대에서 주고받았던 옛날 편지도 박스로 가득이다”며 “돌아가신 후 많이 정리했지만 이제 남은 것도 정리할까 싶은데 생전의 남편 손길이 있으니 없애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다.

연규삼씨의 농사일기는 지난 2005년 충북학연구소에서 개최한 시민기록물 전시에도 출품되어 소개되었다. 당시 시민기록자를 조사했던 김양식 박사는 “연규삼씨는 일기 쓰는 습관이 몸에 익은 농군이다. 그는 논농사와 특용작물로 고추를 재배하면서 틈틈이 소와 염소를 돌보는 농군인데, 그의 나이 18세 되던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며 “군대를 가서 일시 중단했다가 제대한 뒤 다시 영농일기 겸 생활일기를 써 왔는데, 이는 영농인 꿈이 담긴 기록물로 일기쓰는 농부의 삶이 얼마나 소박하고 정직한 아름다움인지를 보여주는 기록물이다”고 소개했다.

하루 하루 땅과 함께 살다간 농사꾼 연규삼씨. 평범한 사람의 생의 기록물이 주인이 떠난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을 보며 작은 거인들이 떠받치고 있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그려본다.

◈ 일기장에 적힌 기록들

◇ 1976년 8월 14일

‘밤새도록 천둥과 번개 속에 엄청나게 많은 비가 내렸다. 논두렁이 떠내려가고 망차가 무너지는 큰 장마가 닥쳐왔다’

◇ 1976년 9월 19일

‘알타리 무우 밭에 씨 속아주고 비료 농약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 보다 아직은 월등하게 좋아 보인다’

◇ 1977년 3월 5일

‘기온이 영하 14도까지 내려가는 또 바람이 세차게 부는 추운 날씨다. 집 지으려고 날짜까지 받아놓고 대목은 마음대로 잘 되질 않고 있다.’

◇ 1978년 4월 22일

‘오늘부터 논갈기를 시작했다. 진넘어 다섯마지기를 갈았다. 못자리터는 조금 빠진다. 하지만 일찍 다 갈고 행갈구리 조금 갈음. 아버님 설악산 여행 출발. 부친 5000원’

◇ 1982년 4월 14일

‘모자리 함. 어제 오후부터 몸이 아프고 감기 기운이 잇더니 오늘 아침은 일어 날 수가 없다. 규덕이 아버지를 얻어서 모자리를 하게 했고, 작은 아버지 어머니와 아버님이 거들어 주셨다.’

◇ 1978년 6월

‘후라단 입제 28봉 1320 가스가민분제 13봉 700 훼나진 수화제 3봉 1255 키타진 유제 5병 930’

◇ 1981년 5월 4일

‘내일 고추 심을 장보러 감. 배추 900 식용류 1200 생선 1000 세탁비누 360 교통비 240’

◇ 1978년 9월 26일 

‘춘우와 장에 감. 고추 7근 2800(3100) 19600, 무우 깨 1000, 비용 100’

◈ 고 연규삼씨

1948년 충북 도안 출생. 27세에 정진애씨와 결혼하며 도안 노암리에 정착, 평생 농사를 업으로 삼았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2010년 폐암으로 돌아가셨다./연지민기자yeaon@cctimes.kr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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