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부는 바람
4월에 부는 바람
  • 정규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 승인 2013.04.1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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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봄바람은 봄·바람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봄바람은 나른한 따사로움과 부드러운 바람결을 따라 몸과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며, 또 설레이는 처녀 가슴같은 두근거림, 그리고 그 속에 은근히 스며들어 있는 춘정을 닮은 설익은 농염이 있다.

그런데 요즘 부는 바람은 계절은 봄이 틀림없음에도 어딘지 석연치 않아 봄바람임을 느끼지 못하게 하니, 말 그대로 봄·바람처럼 짝을 맞추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있는 듯하다.

하기야 요즘 봄바람은 그 결끝의 날카로움이 좀처럼 무뎌지지 않은 채 여전히 날카로운 냉기를 감추지 않고 있는데다 서쪽 바다 건너 머나 먼 대륙에서 잔뜩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사람들의 눈 코 입을 가리게 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빼앗긴 들’과 ‘빼앗긴 봄’을 한탄해야 하는 4월이다.

김수영은 노래한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 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푸른 하늘을. 전문>라고.

해마다 이 맘때면,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우리는 4월이 어쩌다 ‘잔인한 계절’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안다.

수유리 개나리 꽃망울이 서럽고, 일찍 핀 목련꽃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서러운 몰골로 세상과 하직하는 사이, 우리는 그 해 4월 완성되지 못한 혁명의 끝자락에서 목놓아 울던 이 땅의 젊은 피를 애써 기억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53돐을 맞는 4.19 혁명일.

그 옛날, 젊은 피가 거리마다 흩뿌려지는 뜨거움을 갓 태어난 내가 어찌 알겠냐마는,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바람에 실려 퍼지는 은밀한 소식을 통해 어림짐작하고 있을 뿐.

그저 다시 김수영의 노랫말처럼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풀>의 푸르름이 여전히 부럽기는 하다.

4.19는 한 해 뒤 터진 5.16에 의해 그 피울음의 색깔이 달라졌고, 그 거리로 뛰쳐 나온 군인들로 인해 여전히 미완의 것으로 남아있다.

무엇이 혁명이고, 무엇이 쿠데타이며 또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를 시시비비 가려내야 하는 일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다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80년 서울의 봄 시절, <4.19 혁명의 현대사적 고찰>이라는 제목의 토론회 전단을 안주머니에 꼭꼭 숨기면서 은밀한 발걸음을 내딛던 뜨거움이 지금 내게 남아 있지 않은 서늘함에 소스라칠 뿐.

주인공만을 달리한 채 역사는 어쩌면 이다지도 처절한 고통을 되풀이 하는지, 눈물 훔치며 군화발을 피해 골목길을 뜀박질하면서 몸을 숨기느라 허둥대던 그 치열함은 도대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황망스럽기만 한 봄날은 가고 있다.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군사독재의 망령은 4월과 5월, 그리고 6월 거리를 가득 메운 피의 냄새를 타고 물러 선 듯 하나 이제 우리는 자본의 독재에 억눌리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일을 힘겨워 한다.

세상은 온통 이분법. 부자와 가난한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자본가와 고용된 노동자 등 극단의 대립은 갈수록 첨예화되고 있고 또 4월 혁명의 뜨거움을 노래하던 젊음이 이제 살아 갈 날이 살아 온 날보다 결코 길지 않음을 외면할 수 없는 늙음이 서로를 서러워 하는데.

그런 서늘함을 여전히 채워주지 못하는 봄바람의 차가운 결기를 견디지 못한 채 흐드러진 벚꽃이며, 개나리, 목련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흩날리는 봄 밤.

4월이 왜 잔인한지, 그리고 그 서럽게 빼앗긴 봄날은 언제쯤 되찾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데, 바람은 힘들어 하는 봄을 밀어 내기 위해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에서 이리저리 가냘픈 꽃잎을 몰아가고 있다.

문득 포근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그립기만 한 봄. 모두들 안녕하신지. 혁명은 아직도 여전히 외롭고 고독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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