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충북 도정의 산 증인 최만식씨(82)
<2> 충북 도정의 산 증인 최만식씨(82)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3.04.18 1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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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 충청인의 기록으로 본 시대읽기
시민기록자 최만식씨와 김양식 충북학연구소 소장
40년된 업무일지·추억담긴 일기장… '기록의 보물창고'

"첫 공채 6급 1호 합격통지서·추억으로 남은 누런 월급봉투
"금상 받은 행정업무지시서 등 충북 도정 반세기 기록
"오랫동안 보관해온 자료들 20세기 밝혀줄 귀중한 재산"

“내가 아들 집으로 이사하려고 이사짐을 싸는 중이예요. 책이 방으로 하나 가득인데 가지고 갈수도 없고 해서 고물상을 불렀어요. 조금 있다가 고물상에서 올 건데 시간되면 지금 우리 집으로 오시겠어요”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연재하며 시민기록자를 탐방하던 첫날부터 취재는 긴박했다. 사전 조사를 통해 시민기록자를 수소문하던 중 40여년 공무원 업무일지를 썼다는 최만식씨께 인터뷰 요청 차 전화드렸더니 그날 고물상이 오기로 했다는 말이었다.

“이사짐 정리되면 인터뷰하자”던 어르신께 “이사하면서 자료 버리시면 안되요”하며 거듭 부탁드린 후 받은 전화였다. 고물상이 온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가보니 어르신의 서재는 기록의 보물창고였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적어둔 업무일지는 물론이고, 일기와 60년대 공무원 교육을 받으며 강의를 받아적은 노트까지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노트에는 관련된 문서들이 갈피갈피 들어있어 한 장 한장이 최만식씨의 개인 역사이자 충북 지역의 역사였다.
1956년 일기장

공무원 업무일지 중 충북도에서 농정을 담당했던 기록에선 1972년 8월 수해현황도 자세히 볼 수 있다. 가옥피해상황 비교표가 첨부된 노트에는 전국에서 수해현장에 지원된 양곡과 지원물자를 기록해 두었으며, 주택복구재원별 내역서에는 정부보조금과 융자, 자력부담으로 구분해 수해 현황과 지원 상황을 표로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1972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체육관에서 열린 새마을 소득증대 촉진대회 안내서도 빛바랜 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또 1967년 내무부지방행정연수원 교관연수과정 시간표와 강의를 듣고 필기한 노트와 1968년중앙공무원 교관훈련과정 연수 시간표와 강의 노트에선 김옥길 강사의 특강을 받아적은 꼼꼼한 필기도 엿볼 수 있다.

40여년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받은 증서나 상장은 최 어르신의 소중한 기록이다. 그중에서도 1955년 첫 공채 6급 1호인 합격통지서와 지방부이사관으로 퇴직한 공무원 1호의 기록은 더 없이 자랑스러운 족적이다.
공무원 공채 1호 합격통지서

“공무원 생활 중 가장 뿌듯한 일로 주민 숙원을 해결했을 때”라는 어르신은 “단양 군수로 있을 때 주민들의 숙원이 생활 용수였어요. 하지만 마을까지 끌어올 물이 없는거야. 그러던 중 마을 할머니께서 동굴에 물이 많이 난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지. 그 물로 마을이 상수도물을 해결할 수 있었어요. 참 오래전 일이지”라며 회고했다.
업무일지

문서 한장 한장을 다시 펼쳐질 때마다 어르신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현대인들에겐 추억으로 남아있는 누런 월급봉투(1989년)도 보이고, 스무살 청년 시절, 청주대학교 재학 중 군입대했을 때 받은 학적부(1950년대)도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책갈피에 간직되어 있다.
최만식씨의 청주대학교 학적부(1950년대)

어르신의 개인 자료 중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남북 분단 속에 국민학교를 졸업해야 했던 어르신의 이력을 보여주는 두 장의 졸업장도 눈에 띄었다.

최 어르신은 “해방 후 북쪽에서 학교를 다니다 6.25가 터지면서 고향인 음성에서 국민학교를 다녔어요. 그런데 어느날 북쪽에서 국민학교 졸업장을 보내오드라고. 마지막 졸업은 고향에서 했으니 졸업장이 두개가 되었지”라며 “남북 분단의 아픈 현실이 담긴 졸업장이예요”라고 설명했다. 분단의 현실을 문서로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1989년 월급봉투

60여년의 방대한 기록들이 지금도 남아있는 것은 큰 아들 덕이라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공무원이 된 후에는 1961년부터 충북 도정 업무일지를 썼다”는 어르신은 “보통 인사이동이 나면 문서들은 다 버리게 되는데 나는 큰 아들이 단독주택에 살고 있어 퇴직할 때까지 보관해달라고 했죠. 90년 퇴직 후 집으로 옮겨왔으니 자료가 온전히 보관될 수 있었습니다”고 들려줬다.

하지만 이 많은 자료도 이제 짐이다. 병환으로 큰 아들과 살림을 합치야 하는데 둘 곳이 없어 버려야 할 형편이다. 평소에도 술 한잔 드시면 버려야지 결심했다가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온 기록들이니 ‘딸 시집보내는 것처럼 심란하다’신다.

“자료를 버리려니 심란해요. 평생을 모아온 건데 그렇다고 아들집으로 가져갈 수도 없고, 고물상에 버리려니 마음이 얼마나 울적한지 말야. 심란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니까. 도서관에 기증하려고 알아봤더니 5년이 넘은 것은 안 받아준다고 해서 고물상을 불렀어요. 마침 기록을 찾는다고 하니 사장될 뻔했는데 다행이예요”라며 기뻐하셨다.
◈ 최만식씨1932년 충북 음성 원남 출생. 1955년 제1회국가공무원 공채 1기로 합격. 1975년 음성군 초대부군수, 단양군수, 제천시장, 보은군수, 음성군수, 초대 충북도공영개발사업단장, 1990년 지방이사관으로 46년 공무원 직을 마감했다. 현재 청주 모충동에 살고 있다.


김양식 충북학연구소 소장은 “1972년 행정업무 제안으로 금상을 수상한 업무지시서, 1984년 시장연수록, 각종 도정 관련 수첩 등은 충북 도정 반세기의 산 기록들이다”라며 “최만식 선생은 충북 도정 반세기의 살아있는 증인이자, 그가 보관해 온 자료 하나하나는 20세기를 밝혀줄 귀중한 기록물로 기억될 것”이라고 자료적 가치를 전했다.

최 어르신은 “필요한 곳에 기록이 잘 활용되었으면 한다”면서 “다른 사람들의 기록도 많이 찾아내 기록의 소중함을 알리고 시민기록의 역사를 이어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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