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풍토 조성이 먼저다.
창조적 풍토 조성이 먼저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3.04.01 2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권혁두 국장(보은·옥천·영동) 

창조(創造)는 박근혜 정부의 슬로건이자 모토이다. ‘창조경제’는 인수위 시절부터 누누이 되뇌어온 새 정부의 핵심정책이고, 미래창조과학부는 창조경제를 기획하고 주도할 컨트롤타워로 통한다.

그러나 정부가 출범한지 한달이 지났는데도 창조의 개념과 창조경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사전은 창조를 ‘그동안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냄’으로 풀이한다. 이 해석대로라면 엊그제 청와대의 ‘대국민 사과’가 창조적이기는 했다. 명색이 국민을 상대로 한다는 사과를 비서실장 명의로 하고, 이 마저도 대변인이 대신 발표했다.

그동안 없었던 형식이었다는 점에서 창조로 인정할 만하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을 바라보며 아침이슬을 부르고 어쩌구’ 하는 따위의 기만적 수사들을 없애고 단 17초만에 요지만 전달한 것도 창조적 발상이라고 우기면 그렇다고 할 밖에 없다.

물론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정신이 이런 차원은 아닐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이 구호를 기존의 낡은 관행과 가치를 극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새 정부의 굳은 의지로 해석한다. 그러나 창조와 경제를 결합한 창조경제에 이어 그 지향점으로 ‘국민행복’이 거론되는 등 모호한 개념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전문가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리는 형국이 됐다. 아직 구체적 실천방안이 발표되지않은 탓도 있지만, 애초부터 알맹이없는 구호는 아니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제 있었던 당정청 워크숍에서도 적잖은 여당 의원들이 창조경제의 실체를 모르겠다며 청와대 수석들을 몰아붙였다고 한다.

수석들이 차례로 나서 나름대로 논리를 폈지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의원이 태반이었다고 한다. 정계의 지적처럼 창조경제와 국민행복의 정체를 시원하게 밝힐 실질적인 정책 마련도 중요하지만 더 급한 것은 청와대와 정부, 나아가 사회 전반에 창조·창의적 기풍을 조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오늘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지만, 유태인은 “오늘은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이미 통용되는 낡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새로운 지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시하는 그들의 교육 풍토를 빗댄 얘기다.

한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스라엘 대학의 토론시간은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대강당에 모인 수백여 학생들이 서너명씩 팀을 이뤄 따지듯 소리치고, 열을 올리는 모습은 배움터가 아닌 싸움터를 방불했다. 반론과 재반론이 격돌하고 재재반론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나서야 다수가 수긍하는 합리적 결론이 도출된다. 전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한 유태인들이 노벨상 수상자의 23%를 차지하는 이유가 이 대강당에서 발견된다. 끊임었는 의문으로 설익은 진리를 보완하고 눈치보지않고 자기의 주장과 소신을 피력하는 자유로운 토론문화가 그것이다.

이견을 거부하고 ‘일사불란’을 중시해 언로가 틀어막힌 권위적 조직에서는 창조성이 발현되기 어렵다. 구성원들은 더 나은 대안이 있는데도 그냥 가슴에 묻어두고 지도자의 선택에 오롯이 복종한다.

리더의 지시를 수첩에 꼼꼼하게 받아적고 받아적은대로만 실천한다. 이런 조직에는 결코 창조적 역량과 소양이 찾아들지 않는다. 무능과 무소신을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으로 포장하는 이런 참모들에게 악몽은 창조적 리더를 만나는 것이다. 조직에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적 발상을 기대하는 지도자가 이런 참모들을 곁에 둘리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창조적 리더가 이끌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우울한 질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