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딸 서영이
내딸 서영이
  •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 승인 2013.03.07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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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한 때 나는 공중파 방송의 일일드라마에 몰입했었다.

본의 아니게 서럽던 시절. 불행은 겹겹이 나를 둘러 싸고,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채 2년여의 낙담이 거듭되던 계절에 나는, 엉뚱하게 TV에 정신이 팔려 울고 웃는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그 때 내가 TV 일일드라마를 탐닉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밤 9시 메인뉴스를 앞두고 편성되는 대부분의 일일드라마는 허탈하거나 복잡한 두뇌를 쓰지 않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들여다 보기만 해도 좋을 만큼 가볍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다.

공식화되다시피 한 일일드라마의 해피앤딩식 결말은 그 서럽던 시절, 내가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이기도 했다.

한국 공중파 방송의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의 경우 대개는 주 시청자층을 가족 전체로 설정하고 있는 탓에 잡다한 인생살이의 희노애락을 편안하게 터치하고 있다.

반면에 주중에 방송되는 드라마의 경우 성인층의 시청자를 공략하는 시청율 경쟁에 초점이 모아지면서 때로는 짙은 사회성을 띠기도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지난 해 9월 15일 첫 방송을 시작한 KBS2TV 주말드라마 <내딸 서영이>가 지난 3일 47.6%라는 경이적인 자체 최고 기록을 세우고 종영됐다.

아버지의 꿈과 무한대의 자식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아버지의 의자’를 긴 여운으로 남기고 대단원의 막을 내린 드라마<내딸 서영이>는 흔하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처연하게 풀어내면서 이 땅의 가족들에게 새삼 가슴 뭉클한 감동을 이끌어 냈다.

주인공 서영이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스스로를 희생하며 어렵서리 성공을 거둔 의지의 여성이다.

다만 서영이의 가슴에 상처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은 극도의 거부감으로 표현되면서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으면 하는 극단으로 치닫고…. 그런 서영이 앞에 나타난 백마 탄 왕자 강우재와 결혼하면서 "아버지가 없다"는 거짓말까지 해야 하는 비극적 상황.

그런 헤어날 수 없는 굴레를 남모르게 괴로워하던 서영은 결국 사랑하는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되면서 또 다시 지독한 외로움에 휩싸이게 되나, 끝내는 몰래 숨어서 딸의 행복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며 몸서리치는 통한에 휩싸이고...

그리고 그 숭고한 희생과 사랑으로 뭉쳐진 아버지의 이름에는 또, 아버지라는 이름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좌절된 꿈과 소통의 어려움, 그리고 궁핍한 살림살이의 질곡이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어쩐지 늘 쓸쓸하다.

드라마 <내딸 서영이>에는 자신을 버린 자식조차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아버지와, 경제적 풍요는 있으되 오로지 바깥 일만이 우선이면서 권위적인 또 다른 아버지. 그리고 젊은 시절 절절한 남녀간의 사랑이 변색되면서 아내에게 조차 무시받기 일쑤인 또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 서로 외롭게 그려진다.

봄비가 처연하게 내렸다. 꽃들에게는 희망이 될 봄비를 맞으며 외롭기 그지없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을 생각한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를 너는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잎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 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정호승. 수선화 전문>

나는 지금 외로움에 사무치는 시 한수 읊조리며 봄비 속을 거닐고 있다.

오랜만에 아버님 무덤가에 다다르면 또 이런 싯귀가 떠오를 테지.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봄비 전문>

외로워도 봄은 봄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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