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것과 남는 것
떠나는 것과 남는 것
  • 충청타임즈
  • 승인 2012.12.28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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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그 때 나는 고국에 있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들뜬 환희를 주체할 수 없고, 다른 이들은 멘탈이 붕괴된 듯한 처절함을 느낄 때, 나는 데이터 로밍 요금이 부담스럽다는 어설픈 핑계로 고국으로 부터 전해오는 소식을 짐짓 모른 척했다.

그리고 그날이 사흘 지난 후 돌아 온 고국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쫓기 듯 몇날 남지 않은 임진년 한 해를 마감하고 있을 것이다.

60년 만에 돌아 온 흑룡의 해를 맞으면서 야릇한 기대감을 가졌던 일이 엇그제 같은데 벌써 삼백 육십일을 지내왔고, 그 안에 쌓여 있는 수많은 추억을 새삼 되새기고 있다.

지천명을 훌쩍 넘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쯤이면 떠나는 것과 떠나 보내는 것, 그리고 남아 있는 것의 비장함에 익숙할 법도 할 터인데, 몇 잔의 술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송년의 나날은 정말이지 허허롭기 그지없다.

이 때쯤이면 사람들은 한 살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 한 해를 보내는 일상 말고도 정든 사람을 떠나 보내는 쓸쓸함을 함께 겪게 된다.

그 사람이 내게 기쁨이었든, 아니면 가슴 시린 서늘함이었든 간에 헤어짐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진작부터 스토리텔링의 세계를 탐닉해온 최혜실은 말한다.

"모든 사람이 믿는 거짓은 진실이다. 가짜가 현실을 지배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현실인 것이다. 시뮬라르크는 흉내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며, 이 원본없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인데, 절반에 근접할 만큼 절묘하게 구분된 떠난 것과 남는 것의 선택에 대한 현실은 이미 확실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자리 잡고 있음을 더 이상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게 엄연한 세상의 이치 아니겠는가.

사회학자 C.라이트 밀즈는 ‘이성과 자유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권위는 종종 명백히 드러나지 않으며,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을 명백히 드러내거나 정당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때문에 일반인들은 개인적인 문제가 있거나 공적인 문제에 직면했다고 느낄 때 사고와 행동의 목표를 정하지 못하며, 그래서 막연하나마 자신의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를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지 못한다"라고 단언한다.

극단의 갈등과 차이를 훌쩍 뛰어넘어 세대간의 대립과 전쟁이라는 표현마저 나오는 현실이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는데, 사람들은 습관처럼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함을 내세우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다.

문제는 개개인의 그러한 통과의식이 쌓이고 쌓이면서 역사가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제대로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인생 역정이 그리 많지 않다는데 있다.

당장의 이해득실과, 또 코 앞에 닥쳐 있는 듯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이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화석화된 신화와 굴절된 전설보다는 역사에 대한 제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하게 보듬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또 한 해가 저문다.

삭풍이 몰아치는 무심천에서 정희성 시인의 노래를 홀로 읊조린다.

흐르는 것이 물 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전문>

떠나는 것들로 부터 전해지는 아픔이 어디 남는 자에게는 전이되지 않겠는가.

세상사 두루두루 힘겹지 않은 순간 사라지지 않을 터이니, 그래도 새해에는 제 나름대로의 희망으로, 그리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용기를 챙기기 위해 꾸역꾸역 산에 올라 밝은 해를 기다릴, 우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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