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2>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2>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8.0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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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교회

복음황무지에 은혜 전하며 신앙 대물림

▲ 복있는자의 가정예배로 충발한 원평교회 정경 복있는 자의 가정 예배로 출발한 교회 앞이 안보일 정도로 굵은 빗줄기를 가르며 청주를 나서 청원군 미원면에서 보은 법주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티고개를 넘었다. 개명골을 지나 달래강 줄기 제방 아래쪽으로 보이는 시골 마을 보은군 산외'면 원평리에 도착했다. 원평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김형년 목사를 취재하기 위해 나섰던 날은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전국에 산사태와 침수 피해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쏟아지던 빗줄기가 잠시 그칠때쯤 도착한 탓인지 마을 한가운데 하얀 지붕에 뾰족한 십자가를 세운 원평교회가 더욱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원평교회의 역사는 1908년 11월 11일 이 마을 안기수씨 집 가정예배로 시작됐다고 한다. ▲ 교회 초창기 모습

평범한 농민이었던 안씨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을 뿐 아니라 새로운 개화문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가 19세 되던 해 우연히 청주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호기심으로 참석했다가 영적인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지체없이 예수를 믿기로 결정한 그는 곧바로 상투를 자르고 원평리로 돌아와 당시 충북지방순회 선교사 소열도 목사의 전도를 받은 신홍식씨와 함께 원평리 뿐 아니라 청산, 옥천 등지를 다니며 성경을 널리 알리며 복음을 전파했다.

많은 파란과 난관을 견디면서 성심으로 전도한 결과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장·감리교파가 나눠지면서 신홍식씨는 감리교파에 속하고, 안기수씨는 장로교파에 속했다.

신앙이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아야 복음도 더 널리 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가업을 뒤로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기미(己未)년 만세사건 여파로 사회혼란과 생활고 문제로 휴학했다.

그 후 3년 뒤 다시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나 끝내 졸업을 하지 못하고 원평교회 영수, 장로, 청산교회 파송 전도인, 권서 등 평신도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여생을 바쳤다.

안기수씨는 1920년 둘째 아들을 결혼시킨 후 분가시키려고 200여평 대지에 18평 규모로 지은 집을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원평교회를 설립하고 조사 권서로 헌신한 안기수씨는 교회설립 20년 만에 제1대 장로 장립을 받았다. 2대 장로는 안씨의 둘째 아들 창원씨 이다. 아버지 안기수씨가 장로가 된지 24년만의 일이었다.

3대 일신여자중학교 교장을 지낸 안재명 청주 청북교회 장로 이다.

수대에 걸쳐 독자였던 안기수씨 집안은 그가 기독교에 입신한 후 5남 1녀를 얻게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고 믿었다.

안광국 목사, 일제말기 복음탄압에 만주로 건너가

안기수씨의 장남 안광국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오늘의 위상을 만들어 냈으며, 장로교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다.

안광국 목사는 소열도 목사 가정 서기로 일하면서 청주 청남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 숭실전문 영문과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목사 안수 후 일제말기의 혹독한 복음 탄압과 민족구령 사업이 불가능하자 만주로 건너갔다.

광복과 더불어 귀국해 고향인 보은군 초대 군수로 역임하다가 충청북도 후생과장을 역임 했으나 목사는 목회를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속리산이 달려오다 돌아앉으며/ 한강물이 흘러가는 상류지방에/ 평평한들 중앙에서 묘묘한 집은/ 원평리- 예배당/ 학교학교 주일학교 원평유년주일학교/ 학교학교 주일학교 원평유년주일학교.'

이 노래는 고 안광국 목사가 원평교회 주일학교 교가로 1910년 당시 평양신학교에 재학중이던 때 작사했다.

당시 원평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은 예배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즐거워 했다. 예배당을 떠들썩하게 하던 주일학교 학생들이 대부분 고향을 떠나 이제는 70줄에 들어섰고, 몇몇은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주일학교 학생이였던 남장희 선임장로는 원평교회에서 장로가 되어 고향을 지키고 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교회

"선교를 위해서 작은 교회를 후원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동안 미자립교회로 있던 원평교회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충북노회 총회에서 자립교회로 선정됐다. 하지만, 자립교회라고해서 형편이 썩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더 어려운 미자립교회를 돕기 위해 교회 내 남선교회와 여전도회를 설립해 현재 3곳의 미자립교회를 돕고 있다.

농촌교회가 다 그러하듯이 노인층이 교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경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농촌의 인구가 노령화된 것에 의한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인구층의 절대적인 감소현상에 따른 교인수의 감소추세도 심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교회 내 일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 이는 곧 농촌교회의 자생력을 떨어트리는 근본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위기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형년 목사가 지난해 원평교회로 부임하면서 친교와 섬김, 신앙과 교육을 목표로 전도한 결과 교회 출석인원이 100% 늘어났다.

김 목사는 이대로 20년 30년 후에는 교회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 원평교회의 맥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현 교회터에 양로원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죽음을 각오하며 해외에 나가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돕고 싶다"고 말하는 김 목사는 지난 2005년 8월 이곳 원평교회와 인연을 맺었으며, 2년 앞으로 다가온 교회 100주년 기념행사준비로 분주하다.

그 일환으로 오는 11월 둘째주 주일, 원평교회 출신 출향인들을 교회로 초청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에 앞서 오는 9월에는 홈커밍데이를 가질 예정으로 농어촌교회 살리기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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