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6>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6>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06.08.0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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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 대왕의 아말라카 수토파(탑)
함영덕 시인. 극동정보대 교수

만민평등사상 제창 누구나 열반도달...
인도 통일하고 불교전파한 아소카 대왕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실린 아말랄카 탑에 얽힌 구절이 떠올랐다. 기원전 273년 마우리 왕조의 아소카 왕이 즉위하여 탁실라와 카슈미르를 포함한 넓은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아소카 왕은 유난히 참혹한 정복전쟁을 치른 뒤 불교에 귀의하여 백성을 개종시키는데 평생을 바쳤다. 또한 종교적 관용과 약초 재배, 인간과 동물을 위한 병원 건립을 강력하게 권하는 내용의 조칙을 현지어로 새긴 비석을 여러 나라 곳곳에 세웠다. 그는 겐지스강 유역에 봉안된 석가모니 사리를 발굴해서 왕국의 주요 지역에 배분했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전파한 최초의 대왕이다.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 왕조의 3대 아소카왕은 인도 전역을 통일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 왕이 병들어 죽음이 가까워오는 것을 느끼고 진기한 보물들을 희사함으로써 선업을 쌓는 공양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권력 있는 가신이나 주변 신하들이 왕의 뜻을 반대했다.

식사 때 인도의 약용 과실인 아말라카를 먹지 않고 손으로 만지작거렸더니 형태가 거의 망가졌다. 왕은 과실을 손에 쥐고 가신들에게 물었다. "잠주부의 주인은 지금 누구인가" 가신들은 "오직 대왕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 주인이 아니다. 오직 이 반쪽 과실만이 뜻대로 될 뿐이다. 아, 세상의 부귀라고 하는 것은 그 덧없음이 바람 앞의 등불보다 더 하구나. 자리는 천하의 최고이고 이름은 대왕이라 하여 높지만 임종에 있어서는 물건이 궁핍하고 강력한 가신들에 눌려 있구나. 천하는 내 것이 아니고 반쪽 과실만이 내 것으로 여기 있을 뿐이구나"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측근에게 명하여 "이 절반의 과실을 가지고 계원사(鷄園寺)로 가서 스님들에게 시주물로 내되 '옛날 전 잠주부의 주인이며 지금은 오직 반쪽 아말라카 밖에 없는 왕이 대덕(大德) 승도 앞에 예배드리면서 마지막 시주물을 받아주시도록 바라는 바입니다. 몸에 지닌 것은 없고 이 반과만이 겨우 자유로울 뿐입니다. 나의 궁핍함을 가긍히 여겨 복덕의 자량(資糧)을 더 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도록 하라고 했다.

신하들의 얘기를 전해들은 승도 중의 상좌승은 아소카 왕이 천하에 불법을 편 공덕을 생각하고 왕의 뜻을 받들었다. 반쪽 과일을 국속에 끈으로 묶어 넣어 삶은 다음 그 과핵을 수장하여 수토파(탑)를 세웠다. 대왕의 은혜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대왕의 뜻대로 유언을 지켰다. 계원사 가람 쪽에 큰 탑이 세워진 유래를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기술하고 있다.

실로드상의 불교전파

기원전 6세기 오늘의 인도 동북부의 일우(一隅)에서 발생한 불교는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 제 3대 아소카왕의 불교 포교단이 스리랑카, 미얀마,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등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3대륙 여러 곳에 공식적으로 불교 포교단을 파견하여 북인도의 지방종교인 불교를 세계종교로 격상시켰다. 아소카 왕의 포교로 현재 스리랑카인 씰란은 최초의 불교전파지인 동시에 소승불교를 기반으로 한 남방불교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씰란에 대한 포교를 기점으로 전파된 불교는 기원 후 9세기 경 서아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을 망라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범 아시아적 종교가 되었다.

1천여 년에 걸쳐 전파한 불교를 몇 단계로 나누어 보면 제1기 초전단계로서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이 씰란을 비롯한 3대륙 여러 곳에 정식 포교단을 파견해 전파한 시기를 들 수 있다.

제2기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서역지방을 거쳐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된 시기로 대승불교의 출현과 더불어 주로 오아시스 육로를 통해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서역 일원으로 북상한 후 동전(東轉)하여 중국이나 한국, 일본까지 전파되어 최대의 동북아 불교권을 이루었다.
   

제3기는 기원후 7-9세기 경 씰란과 가까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5세기부터 소승불교를 받아들인 후 이를 바탕으로 7-8세기경에는 타이와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 반도, 그리고 멀리 자바섬에까지 불교가 동남아시아에 전파된 시기를 말 할 수 있다.

제4기는 9세기 이후 불교가 티베트와 네팔 등 히말라야 오지로 유입된 시기이다. 인도불교가 쇠퇴하면서 그 구제책의 일환으로 출현한 밀교의 실험장이 바로 티베트와 네팔 등 히말라야 산맥 일원 이었다.

이와 같이 불교가 범아시아적인 종교로 확산된 것은 계급과 신분적 차별을 극심하게 강요하는 브라만교의 질곡과 관습을 깨고 만민평등 사상을 제창하면서 하층민을 포함한 모든 중생이 중도(中道)를 따르면 누구나 구원을 받으며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편타당한 교리를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불교의 전파를 수용하게 된 객관적 요인은 중국을 비롯한 유교문화권 나라들에서 현실정치나 윤리도덕의 치법(治法)에만 치중하는 유교나 유학이 안고 있는 한계성 때문이다.

유교만으로는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고 다스릴 수 없음은 물론 미래 세계에 대한 비전도 제시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공백을 채워줄 새로운 사상과 종교의 출현이 절박한 시대적 요청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업보와 윤회사상에 바탕을 둔 불교가 인간과 사회 제반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궁극적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게 되었다.

4세기 초에 건립된 인도의 굽타 왕조(320-520)는 복고적인 브라만 보호정책을 추구함으로써 불교에 타격을 가했고 이를 계기로 힌두교가 불교를 압도하기 시작하여 불교는 점차 힌두교에 흡수되어갔다.

이것이 이른바 불교의 힌두화이다. 이와 더불어 7세기경에 흥기한 밀교는 원시불교의 변질을 가져왔고 이즈음부터 시작된 이슬람교의 동점(東漸)은 큰 외압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흡수와 변질, 외압으로 인해 9세기경부터 발생지인 인도에서 점차 쇠퇴했다. 13세기 초에는 마침내 인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불교의 전파는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보편종교의 전파와 비교할 때 과정이나 결과에서 일련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 번째로 당초부터 분파권적(分派圈的)으로 전파되었다. 기원전 3세기 씰란 전파를 기점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전파된 것은 시종 소승불교였다. 기원전 1세기를 전후로 서역과 동북아시아 일대에 전파된 것은 대승불교였다. 이러한 초기단계의 분파권적 전파로 오늘날까지도 크게 남방 불교권과 북방불교권으로 나뉘어진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강한 변용성(變容性)이다. 불교는 인도문화를 대동하고 침투하여 침투지의 사회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그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는 한편 자신도 전파지의 사회문화에 영합. 순응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 영합적인 종합문화를 창출하여 거의 토착화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전파의 방도가 평화적이라는 점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살생이나 전쟁에 의한 전파란 금물이며 실제로 불교사에 전파를 위한 성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평화적인 전도로 인해 피정복지의 위정자들로부터 쉽게 비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인류역사상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종교가 출몰하였지만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종교문화권을 이룬 종교는 얼마 되지 않는다. 더욱이 불교는 인도를 떠나 타국에서 변형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발전하였다. 오늘날 세계 3대 종교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생명력도 이러한 평화적이고 전파지역에 순응하는 능력과 인류를 사랑하는 보편적이며 절대평등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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