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영화와 동짓달
007영화와 동짓달
  •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 승인 2012.11.0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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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음력 11월은 동짓달로도 불려진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며 떠나간 그녀를 그리워하는 노래 ‘잊혀진 계절’에 애잔하게 담긴 시월의 마지막 밤을 보낸 뒤 맞은 11월의 시작은 을씨년스럽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고 노래했던 황진이의 마음을 엿보면 밤이 무시로 길어지는 동짓달의 시작을 반드시 쓸쓸함만으로 남겨 둘 수는 없을 일이지 싶다.

시(詩)가 널리 읽히지 않는 시대가 꽤 오래 이어지고 있다. 문단에서는 다수의 시집을 몇 십만 부 찍을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시는 사람들에게서 자꾸만 멀어져 가고 시인의 마음은 좀처럼 �!賤痴� 않고 있다.

그뿐인가. 우리나라 대형서점들은 다달이 시집 베스트셀러 순위를 발표하는 지구상의 유례가 드문 친절을 베풀고 있음에도 시를 읊조리는 낭만과 여유는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에서 소위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시집은 250만부가 팔렸다는 ‘홀로서기’를 비롯해 도종환시인의 ‘접시꽃 당신’, 김초혜의 ‘사랑굿’, 이해인의 ‘민들레 영토’,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 알았더라면’ 등이다.

그밖에 이정하의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를 비롯해 예반의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용혜원의 ‘네가 내 가슴에 없는 날은’과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등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시집들로 기억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많이 팔린 시집들이 대부분 1980년대와 90년대 등 이미 지나간 20세기에 나타난 현상들이라는 점이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회가 극성을 부리고, 지금과 비교하면 그 만큼 살기 팍팍한 시절에 오히려 시가 두루 읽혔던 것인데, 소위 지식정보사회로의 본격적인 진입이 개시된 21세기에 유독 시가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은 아이러니하다.

첫 시리즈가 시작된 지 50년이나 된 007영화의 23번 째 작품 ‘007 스카이폴(Skyfall)‘이 지난 달 26일 개봉된 이후 30%를 넘나드는 예매율을 보이며 관객 모으기에 한창이다.

주지하다시피 007시리즈 영화는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한 첨단무기를 매번 등장시키면서 신무기의 가공할 위력이 실제로 적용되는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세상의 첨단 기술 역시 진화를 거듭하면서 피로 증후군이 쌓인 것일까.

50년을 맞이하는 23번째 007시리즈 ‘스카이폴’은 예전의 그것과는 다른 솔직함이 있다.

이 영화는 첩보원 007, 그 영원히 늙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제임스 본드의 늙고 무기력함을 감추지 않는 인간적 접근을 처음으로 선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 ‘007 스카이폴’은 지문을 인식해 오직 사용자만이 발사할 수 있는 구닥다리 기술만 제공할 뿐, 더 이상의 첨단은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승차감이 별로 좋지 않은 구식 자동차를 버젓이 등장시키고 있음은 물론 옛날 무기로 악당과 대결한다. 그런데 악당은 헬리콥터를 포함한 신식무기와 가공할 해킹 능력으로 정보를 장악하고 있으니, 첨단이 인류에 반드시 공통으로 유익한 것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그리고 또 있다. 악당은 다름 아닌 정의의 수호신을 내세우면서 폭력성을 감추지 못했던 내부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007은 변하고 있다.

첨단만을 내세우며 끝없는 진화를 추구했던 007이 50년을 맞으면서 시도하는 변화는 감성이다. 그리고 그런 감성을 바탕으로 새삼 그리워지게 하는 아날로그인 셈인데, 우리도 007과 황진이를 닮아 동짓달 기나 긴 밤을 아껴두며 다시 따뜻한 감성을 찾아 깊게 서로를 사랑할 동짓달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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