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충주호반 물결위로 애향의 정·사람 향기 흐르고 …
<14> 충주호반 물결위로 애향의 정·사람 향기 흐르고 …
  • 박연수 <산악인>
  • 승인 2012.11.0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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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수 대장의 '충북을 걷다' 충주 살미면 신매리서 종민동까지
박연수 <산악인>

신매 삼거리서 오른쪽 무릉리로
재오개마을 가는길 망향정 눈길
꿀벌 생태체험 '하니마을' 지나

신매 삼거리서 오른쪽 무릉리로
재오개마을 가는길 망향정 눈길
꿀벌 생태체험 '하니마을' 지나

벌써 충주까지 당도했다. 먼 거리를 걸어오면서 오고가는 도민들과 함께했다.

7일째, 또 다른 동행자가 인사를 한다. 도교육청의 초등담당 장학사와 충주에서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다. 짧은 거리라도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다. 제법 인원이 많이 불었다.

신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무릉리(武陵里)로 간다. 무릉리 또한 1985년 충주댐 완공과 함께 수몰됐다. 현재는 산쪽으로 이주해 새로 조성된 마을이다. 수몰 당시 무릉리에는 135가구 657명(남 329, 여자 328)이 살았다. 우리는 좌측길을 따라 매남고개를 넘어 재오개 마을로 들어선다. 길가 옆 산모퉁이에 망향정이 서 있다. 망향비는 살미초등학교 총동문회와 재오개 주민들이 함께 세웠다. 망향비에는 ‘정든 이웃 뿔뿔이 흩어져 대처로 나가고 실향민의 처지가 되어 고향은 꿈에도 못 잊을 그리움으로 남았다’고 적혔다. 애향의 정과 실향의 아픔을 달래고 위로하고자 세운 망향정는 충주호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검게 드리운 짙은 안개는 금방이라도 실향민들의 아픔을 눈물로 쏟아 낼 것 같다.

재오개마을에 도착했다. 재오개(才五介)마을은 동막골과 흑석, 도선골, 하재오개, 상재오개의 5개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다. 동네 입구 원두막에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잠시 쉬며 재오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주민들은 동네유래가 두 가지 있다고 한다. ‘다섯 고개를 넘어 물가에 있는 동네마을이라 해서 재오개’라는 설과 ‘조선 초기에 이 마을에 왕기를 타고난 아이가 있었는데 다섯 살이 되어 이미 문무를 겸비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금봉산 줄기와 재오개 고개의 혈을 끊었고, 이로 인해 아기장수는 죽게 됐다’는 설이다. 마을사람들은 다섯고개 이야기는 어릴적부터 들었고, 아기장수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 들은 이야기라 한다. 이곳 재오개 마을에는 다섯개의 고개가 있는데 신매리로 넘어가는 매남고개, 직동 발티마을로 넘어가는 발티, 석종사로 넘어가는 성재, 목벌동로 넘어가는 진의실재, 남벌로 넘어가는 하느골재다.

동네이름은 원래 불리는데로 쓰다가 한자로 변해 지어진다. 그 한자를 보고 재해석을 하다보면 뜻이 완전히 다른 이름이 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도선골이 나온다. 도선골 지나 발티를 넘으면 직동 발티마을이 나온다. 이 고갯길은 청풍에서 충주를 가는 지름길이었다.

재오개 마을은 총리실과 1사 1촌을 맺었다. 도선골은 국내 최초로 인공수정을 통한 여왕벌 육성에 성공했고, 꿀벌생태체험을 할 수 있어 하니마을로 불린다. 지난해 ‘2013 향토산업육성사업’ 대상으로 선정됐고 ‘2011 대한민국 농어촌 마을대상’ 시상식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꿀벌과 사과, 매실이 특산품인 하니마을은 2008년에는 농촌전통테마마을에 이어 올해 산촌생태체험마을로 지정됐다. 40가구에 80여명의 주민이 만들어가는 농진청에서 선정한 살기 좋은 마을 100선에도 포함 됐다.

하재오개 마을을 통과해 오르막을 오른다. 좌측에는 포크레인이 산을 파헤치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옛날 재오개 마을의 논둑, 밭둑, 집터들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옛 사람들의 삶의 윤곽이 가뭄으로 인해 모습을 보인다. 상재오개마을 길가 옆으로 사과 과수원이 펼쳐진다. 길가 옆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먹구름이 서서히 거치며 태양이 고개를 내민다.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은 성재를 넘어 직동의 석종사로 가는 길이다. 석종사는 문경 봉암사를 지은 목수가 와서 지은 절이다. 이절을 지은 스님은 혜국스님으로 우리나라 스님 중 법력이 10번째 안에 드는 분이다. 따라서 신도들이 전국에서 몰려온다. 스님만들이 아니라 시민들도 선방에 가서 한 달이라도 수도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시민들을 위한 절이다. 성재는 숲이 울창하고 서낭당이 잘 간직되어 있는 고개이다. 성재의 우측능선은 남산(금봉산 636m)을 지나 마즈막재로 이어진다.

우린 우측의 진의실재로 향한다. 진의실재(350m)를 올라 재오개 마을을 바라보니 골도 깊고 산도 높다. 저 멀리 청풍호반이 펼쳐져 보인다. 목벌동 진의실로 내려간다. 길 양쪽에는 꽃이 지천이다. 그 꽃에는 나비가 유유자적 꿀을 빨아드리고 있다. 송찬호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나비는 순식간에

재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진의실에 이르니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요가골을 지나간다. 그곳에는 몇 채의 집이 있다. 꽤 크고 잘진 집들이 여러 채 있다. 요가골 주위에는 온통 사과나무 과수원이다. 이 비탈진 산의 법면으로 사과나무 농장이 이어진다. 네팔 오지마을에 가면 산꼭대기까지 만들어진 논과 밭이 장관을 이룬다. 그것을 다랭이밭이라 하는데 시골의 운치를 더욱더 자아낸다. 살면서 만들어지는 농경지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 요가골에 사과꽃이 피면 충주호와 어우러진 풍경속에 사람의 향기를 담을 것이다.

마즈막재에 이른다. 마즈막재는 삼국시대부터 남한강을 통해 청풍, 단양, 죽령을 넘나들거나 송계, 미륵리, 하늘재를 넘어 영남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유래비에는 ‘옛날 죄수들이 사형장으로 갈 때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이상기 교수는 “마즈막고개는 마슴목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헤어질 때 아주 슬프거나 가슴이 울컥하면 감정이 복받쳐 목까지 올라온다. 그 상태를 충청도 사투리로 마슴목이라 한다. 마슴목이 마슴막으로, 그리고 마즈막으로 변한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지금도 마즈막재는 충주호 관광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는 차량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약수터가 나온다. 목이 말랐던 우리는 한모금씩 나누어 마신다. 시원한 약수 한잔은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감동을 선사한다. 멀리 우리가 걸어온 전의실고개와 굽이쳐 흐르는 남산(금봉산)줄기가 보인다. 계명산휴양림 입구를 지난다. 계명산(774m)은 원래 계족산(鷄足山)이었는데 닭이 뻗대면 재산이 나간다하여 울명(鳴)자를 써 계명산으로 바꾸었다. 계명산은 충주시 북동쪽과 충주호 사이에 능선이 초생달처럼 뻗어 있다. 남쪽으로는 마즈막재를 넘어 남산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는 충주호 건너 지등산(535m)과 마주한다.

종댕이 마을 충주지씨 관향(忠州池氏 貫鄕)에 도착했다. 관향이란 하나의 성씨가 출발한 곳으로 충주지씨는 종댕이 마을을 관향으로 인정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를 실시한 지석영(池錫永)선생이 충주 지씨로 이곳에 동상이 있다. 종두(種痘)는 우두(牛痘)를 사람에게 접종(接種)하는 것으로 천연두의 면역성을 갖게 하고 감염을 예방한다. 종두법은 1796년 5월 영국인 제너(Jenner,E.)가 발견했는데, 우리나라에는 정약용(丁若鏞, 정조 12)의 ‘마과회통 (麻科會通)’의 권말에 부기된 ‘종두기법 (種痘奇法)’에 언급되어 있다. 어릴 적 불주사라하여 맞고 난 흉터가 지금도 어깨에 있다.

계명산가든에 도착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는다. 황미영 센터장이 매운탕을 마련해 줬다. 돌이켜보면 지금껏 누군가가 와서 저녁을 제공해 줬다. 걸으면서 늘 정(精)을 느꼈고, 그 정은 매우 따뜻했다. 충주호가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서 황 센터장은 “비록 하루이지만 너무 의미가 있고, 좋은 추억이 있는 하루를 만들었다. 좋은 경치를 가지고 있는 곳을 잘 살려서 충북도만의 관광자원을 만들면 좋겠다”며 인사했다. 챌리져투어 윤성희 대표가 늦었다며 격려금을 주고 간다.

교직원 공제조합에 도착을 했다. 이곳이 오늘의 숙소이다. 이곳에서 박재인 교수, 이상기 교수와 작별을 한다. 이 교수는 외국어대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충주에 살고 있다. 중원의 역사 문화에 관심이 많아 충주전통문화회 활동을 한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역사문화의 이야기는 모두 이 교수가 이야기 한 것을 글로 옮긴 것이다. 우리는 이 교수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있는' 역사의 브리테니커'라 별칭했다. 오늘 이 교수와 헤어진다.

“너무 아쉽다. 영동 추풍령에서 충주 계명산 자락까지 7일간 동료들과 즐거움을 함께 했고, 힘듦을 같이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다. 동료들이 도담삼봉까지 잘 도착했으면 좋겠다”며 여운을 남기고 아내의 차를 타고 떠났다. 웬지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충주호를 바라보고 있으니 김정훈 본부장이 다가온다. 김 본부장은 우리에게 리차지에너지와 미숫가루를 제공해준 인물로 산 후배이기도 하다. 그는 “형을 볼 때마다 엔돌핀이 솟는다. 형이 간 길을 머지않아 나도 갈 것이다. 어렵더라도 잘 마무리하여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격려의 말로 위로했다.

충주호반의 잔잔함 물결위에 어둠이 내리고 헤어짐의 허전함도 녹아 스며든다. 이어지던 이야기가 어둠에 묻히고 타오르던 발이 편안해 질 즈음 우리 모두는 내일을 기약하며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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