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충북출신 부통령 이기붕 생가 '역사속으로'
<10> 충북출신 부통령 이기붕 생가 '역사속으로'
  • 박연수 <산악인>
  • 승인 2012.10.0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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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수 대장의 '충북을 걷다' 미원면 어암리서 괴산 칠성면 외사리까지
박연수 <산악인>

어암리 새터마을서 살구 한입
삼안교 건너 괴산군 귀만리로
마을 입구 돌장승 2기 나란히

가락·후평리 지나 덕살이마을
만송 이기붕 생가 창고로 변해
솔미재 넘어 고성리 풍광 최고

이른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이희영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셔서 든든하게 출발하라고 올갱이국을 끓였으니 가지고 간다"는 내용이다. 이런 어쩌나! 할 수 없이 지원조가 받아 내일 아침에 먹기로 하고 출발했다. 탑신당 앞 다리서 이희영선생과 헤어지며 출발을 한다. 박대천에 햇살이 드리운다. 박대소(博大沼)는 옥화구경 중 제9경으로 물이 깊고 물가에 청석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고 하는데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없었다. 산 협곡사이를 흘러가는 물길을 따라 걷는 우리는 자연과 동화 된 느낌이다. 갈대숲 너머 흐르는 물에 사는 수많은 생명들은 우리를 묵묵히 지켜 볼 것이다.

어암리 새터마을에 올라서니 살구와 보리뚝이 우리를 반긴다. 모두 달려들어 새콤한 맛을 즐긴다. 이세상의 과일이 가장 행복 할 때는 생명체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생명체는 멀리 이동해 배설을 통해 번식을 시킨다. 자손을 번성시키는 것은 생명체의 기본 욕구인 것이다.

삼안교를 건너 괴산군 청천면 귀만리 삼인동에 접어든다. 귀만리(歸晩里)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廢合)에 따라 청운리(靑雲里), 한천리(寒泉里), 오리(五里), 삼인리(三仁里)를 병합(倂合)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는 삼인리에서 원귀만리를 지나 가락골로 갈 것이다.

37번 국도에서 충청타임즈 연지민 문화부장과 동화작가 오미영씨가 합류했다.

달천을 따라 오리골 들녘이 정갈하게 펼쳐진다. 옥수수밭 또한 괴산에 들어왔음을 알린다. 귀만리는 1980년 대수해로 마을이 완전 전파된 것을 주민이 합심해 마을을 재건했다고 한다. 신월천 합류점을 지나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돌장승 두기가 나란히 서있다. 장승은 덕수라고도 하며 마을 입구에 세워져 마을 수호신 역할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돌장승은 약 50년 전 사담에서 떠와 세워졌다. 천하대장군이라 쓰여 있는 장승은 키가 크고 근엄하며 갓 쓴 모습이고, 옆 장승은 키가 작고 계란형 얼굴에 입술을 굳게 다문 할머니 모습이다. 20년전 까지 동고사를 지냈다 한다. 장승 길 건너 바위벽에는 구만동천(龜灣洞天)과 만포정(晩浦亭)이라 쓰여 있다.

경운기를 타고 지나가던 죽산 박씨(竹山 朴氏·66)라고 소개한 어르신은 "원래 이름은 물가에 거북이가 사는 동네라 하여 구만동(龜灣洞)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후 송시열 선생이 마을지세가 천하 대길지라 여겨 후손들의 세거지로 하고 싶어 했으나 죽산 박씨들이 이미 터를 잡고 있어 그 아쉬움을 표현, 귀만(歸晩)이라 칭해 지금에 이른다"고 마을유래를 설명한다.

이상기 (한국외국어대)교수는 "龜는 거북구, 본받을 귀, 터질균으로 읽힌다. 이것을 사람들이 거북귀로 잘못 읽으며 명칭이 뒤죽박죽이다. 그런 과정에서 귀만(歸晩) 이름은 후대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설은 신월천이 굽이쳐 흐르는 안쪽이 된다하여 '굽이안'이라 한 것이 변하여 귀만이로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만동천으로 들어서니 돌거북이상과 아홉개의 나무 장승이 세워져 있다. 거북이는 십이장생의 하나로 건강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돌거북이상을 세워 주민들의 무병장수를 기리는 염원을 담고 있다. 또한 바쁜 현대사회의 통념을 벗어나 "거북이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겠다"는 동네주민들의 바람을 담고 있다.

마을은 한적하고 고즈녘 했다. 가락교를 넘어 가락리에 접어든다. 가락리는 한천(寒泉)이라 불리운다. 마을 복판에 얼음처럼 찬물이 있으며 땅이 기름지다고 한다.

고개에 오른다. 명지재다. 박 노인은 "이 마을에 큰 인물이 난다해 일제강점기에 일본놈들이 혈을 끊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쇠말뚝이나 다른 흔적은 찾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35년간의 주권을 빼앗겼던 혹독했던 시절의 한이 남아 있었다.

후평리로 넘어선다. 후평리(後坪里)는 청천의 뒤쪽에 있는 뜰이라 하여 뒤뜰이라 불렸다. 행정리로는 박대천쪽의 원후평리와, 늘목과 덕사리 마을을 합친 신후평리로 나뉘어진다. 덕살이마을로 들어선다. 연못이 보이고 연꽃이 수줍게 꽃잎으로 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농장 입구에 '인생은 미완성'이란 글귀가 보인다. 삶은 늘 부족함을 채우는 과정이다. 그 채움에 길이 있고 길에서 길을 찾는다. 걸어가다 걸어가다 보면 조금씩 채워질 것이다.

연못 옆 밭에서 일을 하시는 할머니와 인사를 나눈다. 열여덟에 시집와 60년 넘게 이곳에서 생활 하셨다는 허만옥(80)할머니다. 할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이곳으로 시집와 2남 2녀를 뒀다는 할머니는 모처럼의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 연신 싱글벙글 이다. 재배하는 품목을 물어보니 "구절초다. 구절초는 여자에게 좋으며 인진쑥, 청출뿌링이, 약쑥, 감초와 함께 약으로 다려 먹는다. 농사를 지으면 가져가는 사람이 있다"고 설명을 한다. 미원 성대리가 고향인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생활하시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헤어지며 할머니는 커피 한잔 대접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후평도원로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원후평리가 나온다. 그곳 마을회관 뒤엔 자유당 시절 부통령을 지낸 만송(晩松) 이기붕 생가터가 있다. 이기붕은 4대 부통령을 지냈다. 3·15부정선거에 직접 관여했으며, 4·19혁명 후 일가족이 자살을 한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조선 태종의 첫째아들 양녕대군의 16대손이고, 만송은 둘째아들 효령대군의17대손이다. 양녕과 효령은 셋째아들인 충녕군(忠寧君·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대통령과 부통령을 나란히 하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들어 낸다.

중원대 이상주 교수는 "이 과정을 보면 인과응보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첫째와 둘째의 후손이 나란히 대통령, 부통령을 하는 것을 보면 역사의 묘함을 느낀다"고 설명한다.

마을주민은 "만송은 이곳에서 태어나서 유모가 키우고 어릴 적 이사를 갔다. 생가는 앞집에서 사들여 부수고 창고를 지었다"고 전한다. 다음에 직접가본 생가터는 창고와 밭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참나무 숲을 이루던 동산은 벌목되어 어린 아카시나무가 을씨년스럽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충북 출신의 부통령은 역사속에서 이렇게 사라졌다.

원후평으로 돌아가면 한 시간 이상 더 소요해야 한다. 잠깐 망설이다 우리는 오른쪽 솔미재를 넘어 고성리에 접어든다. 고성리(古聖里)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廢合)에 따라 내고리(內古里), 외고리(外古里), 성암리(聖岩里)를 병합(倂合)하고, 내고리(內古里)와 성암리(聖岩里)의 이름을 따서 고성리라 했다.

마을은 도명산과 조봉산의 품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이곳은 인적이 없고 고요하기만 하다. 여름철 관광객만 없으면 신선이 기거하는 곳과 무엇이 다를까? 큰 산이 병풍을 이루어 호위를 하고 앞에는 큰 강이 흐르니 뉘라서 이 마을을 알까? 마을엔 커다란 돌탑으로 만들어진 기원단과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서낭당이 있다. 서낭당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밤 10시에 마을제를 지낸다고 한다. 승암마을회관과 노인정을 지난다. 성암리는 이곳에서 승암리라 불린다.

달천을 만나니 길가에 햇터마을이라는 큰 입석이 나온다. 1983년 보이스카웃 대원들을 데리고 이곳 강가에서 야영을 할 때는 마을이 없었다. 도로가 나면서 새로 조성된 마을인 것 같다. 2009년 5월 7일 세워진 입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고

눈물로 흙을 적셔라.

그러면 네 눈물이

대지의 열매를 맺어 줄 것이다.

이 땅을 언제까지라도 사랑하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 열광과 환희를 맛보아라.

달천은 계곡사이를 세차게 흐른다.

※ 달천(達川)은 속리산 청법대(1027.2m) 아래에서 발원한다. 달천은 수많은 관광지와 역사의 길을 따라 흘러간다. 지방 2급 하천으로 시작해 법주사와 정이품송을 품는다. 속리를 벗어나 산외에 이르러 장갑리와 삼부평마을에서 큰 소를 이룬다. 미원에 들어서며 옥화구곡이라는 빼어난 절경을 만들어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예언가인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1553~1630)을 만들어낸다. 화양천을 만나 칠성에서 우리나라 1호 수력발전소인 괴산댐을 만든다. 연풍면 분지리에서 흘러내리는 쌍천과 합류해 지방 1급하천으로 격상한다. 괴강을 지나 감물면 불정 너른 들판의 젖줄이 된다. 충주로 들어서며 달천이 빚어 놓은 팔폭병풍 수주팔봉(水周八峰 493m)을 휘감아 돈다. 수안보에서 내려오는 석문동천과 합류하며 국가하천으로 격상하고 충주시 칠금동과 금가면 창동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며 127.9km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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