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는 귀뚜라미
울지 않는 귀뚜라미
  • 김성식 기자
  • 승인 2012.09.10 2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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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기자의 생태풍자
김성식 생태전문기자<프리랜서>

"아기 귀뚜라미가 태어났어요. 메뚜기, 사마귀, 매미 등 많은 곤충들이 귀뚜라미를 보고 인사를 합니다. 웰컴! 굿모닝! 헬로우!… 귀뚜라미는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날개를 비벼도 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현대 동화계의 전설로서 지난 4월부터 9월초까지 한국특별전을 가졌던 에릭 칼의 '매우 조용한 귀뚜라미(The Very Quiet Cricket)'의 한 대목이다.

우리는 귀뚜라미 하면 흔히 울음소리를 연상한다. 특히 수컷 귀뚜라미는 암컷과의 짝짓기를 위해 본능적으로 운다고 알고 있다. 일생에 단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사랑(짝짓기)을 위해 숙명적으로 울음보가 돼야 하는 게 수컷 귀뚜라미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에릭 칼이 뜬금없이 '매우 조용한 귀뚜라미'란 제목으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많은 호응을 얻었듯이 실제 자연에서도 매우 조용한, 시쳇말로 하자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수컷 귀뚜라미들이 심심찮게 있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대부분의 수컷들이 초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7~10시간 이상, 그것도 매일같이 우는데 반해 조용한 수컷들은 하룻밤에 30분도 채 울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밤새 운 수컷들로부터 짝짓기 할 기회를 가로챈다. 얌체족도 보통 얌체족이 아니다. 어떤 수컷은 낮 시간에도 열심히 울어보지만 암컷 차지를 못하고 조용한 수컷에게 빼앗기고 만다. 분통 터질 일이다.

수컷 귀뚜라미가 울음소리를 내기 위해선 여간 애를 쓰는 게 아니다. 한쪽 날개 끝에 돋아나 있는 돌기를 다른 쪽 날개 바깥부분으로 비벼 소리를 내는데 여러 시간 계속해서 우는 데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일로 치자면 중노동이다. 젖먹이 동물이 그런다고 생각해 보라. 양 앞발을 뒤로 하여 빨래판 같은 소리통을 밤새도록 긁어야 하니 고역 중에 고역일 것이다. 일부 수컷들은 그래서 꾀를 내게 됐다. 힘들이지 않고 암컷을 차지하는 방법, 그것이 바로 울지 않고 기회를 노리는 방법이다.

이런 꼼수가 실제 통한다는 사실은 불과 10여전 전에 밝혀졌다. 학설에 따르면 동물들의 의사소통 구조에 근본적인 허점이 있기 때문에 조용한 수컷과 같은 꼼수가 통한다는 것이다. 특히 소리를 통해 의사소통(여기에서는 구애음)을 할 경우 암컷들이 그 소리의 방향은 잘 알아차리는 반면 소리를 내는 정확한 개체, 다시 말해 어떤 수컷이 마음에 드는 소리를 냈는지는 잘 모르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조용한 수컷'에게 사랑을 허락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울지 않는 수컷 귀뚜라미들을 찾아 내 그들의 교묘한 의사소통, 즉 태생적인 구애음을 내지 않고도 짝짓기라는 의사소통에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학자들의 숨은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백로 절기가 지나면서 아침 저녁으로 찬 기운이 돌고 들판 벼이삭들의 고개숙임이 하루 하루가 달라지고 있다. 고추잠자리의 날갯빛도 어느샌가 붉은 고춧빛을 닮아 있고 성급한 밤송이는 벌써 입을 벌린 채 소담한 밤톨을 자랑하며 다람쥐를 희롱하고 있다. 형제 태풍이 순서를 바꿔가면서 한반도를 유린하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으로 암담했던 우리의 자연과 들판이었는데 어느덧 가을다운 햇살을 받아 작년 이맘 때의 풍경을 펼치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귀뚜라미 소리 또한 요란하다. 전체 수컷의 5~10%만이 실제 짝짓기에 성공하는 억울한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컷들이여! 그대들의 이름은 여전히 슬픈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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