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우량관측과 지금의 일기예보
과거의 우량관측과 지금의 일기예보
  • 김성식 생태전문기자<프리랜서>
  • 승인 2012.08.2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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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기자의 생태풍자
김성식 생태전문기자<프리랜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 41년(1765년) 5월 18일자 기사에 재앙을 과장하여 보고한 경기관내 부사를 왕이 직접 파직한 내용이 있다. 그날 영조가 문제 삼은 것은 전날 올라온 우택장계(雨澤狀啓)였다. 우택장계란 강우량에 관한 보고인데 당시엔 각 지역 도백들로 하여금 파발마를 이용해 즉시 보고토록 했을 만큼 중요한 업무였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전날 임금이 경연에 참석한 후 남교란 곳에서 몸소 전야(田野)를 살펴봤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경기도백으로부터 장계가 올라왔다. "경기도내 36개 고을에 동이로 퍼붓듯 비가 쏟아지고 인천의 한 고을은 천병만마(千兵萬馬)가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 같아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는 꺾이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장계를 읽은 영조가 크게 노한 것이다. 규정상 어느 지역에 몇 척, 몇 촌, 몇 푼의 비가 내렸다고 상세히 보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표현으로 얼버무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다 사실을 과장함으로써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결국 해당 부사가 파직당하고 말았다.

우택장계를 늦게 올려 파직당한 이도 있었다. 정조 12년 황해도 관찰사 김○○은 우택장계를 늦게 올린 죄로 파직당했다. 일성록 등에도 우택장계를 소홀히 했다가 문책 당한 사례가 부지기수로 전한다.

조선시대 특히 세종 24년(1442년) 측우기가 발명되고 전국적인 우량관측이 시작된 이래 역대 왕들이 우택장계에 각별히 신경 쓴 이유는 무엇인가. 그 건 바로 강우량에 관한 정확한 자료를 얻기 위함이었다. 측정에서부터 보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엄히 다스리지 않으면 전국 각 고을의 강우 사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강우측정이 시작된 세종 24년에 이미 전국에 내려보내진 측우기 수만도 348개에 이른다. 334개 부·군·현과 14개 도 감영에 설치된 측우기를 합한 숫자다. 그러니 엄격한 규율과 명령체계 또 그에 따른 신상필벌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기별·지역별 강우량 측정 자료의 정확한 수집과 분석은 예나 지금이나 가뭄과 홍수 같은 기상재해 대책을 마련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다.

이러한 혜안과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전세계 기상관측사상 가장 독보적인 나라가 됐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발명했고 또 그것을 이용해 전국가적인 우량관측을 첫 시행했다. 유럽보다 200년이나 앞섰다. 우리나라는 또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기상관측자료(현존자료 기준)를 보유하고 있다.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기사(1770년 5월 13일 경희궁에 약 20mm의 비가 내렸다는 기록) 이후부터이니 무려 240여년에 이른다.

중요한 건 오늘날의 위상이다. 과연 측우기를 발명한 나라로서의 자부심을 여전히 가져도 되느냐는 얘기다. 답은 "글쎄올시다"다. 슈퍼컴퓨터에 기상관측 위성까지 운영하는 체제지만 그렇다고 기상 선진국이라고 하기엔 아직은 이른 듯하다. 더구나 일기예보에 관한 한 국민불평이 여전하다. 정확도가 아홉 번 이상 맞히고 한 번 이하로 틀리는 수준임에도 기상청을 애 나무라듯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재난 때문이다. 재난을 입은 입장에선 열 번에 한 번꼴도 안 되는 오보에도 치를 떤다. 그게 일기예보다. 얼마만큼 잘 맞히느냐도 중요하지만 한 번을 맞히더라도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가치있는 예보'가 더 필요한 이유다. 태풍 볼라벤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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