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믿고 도우며 한발 한발 … 자연 예찬
<5> 믿고 도우며 한발 한발 … 자연 예찬
  • 박연수 <산악인>
  • 승인 2012.08.1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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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수 대장의 '충북을 걷다' 미전리서 백운리까지

박연수 <산악인>

목골재 내려와 목동리 느티나무 쉼터에
잡초무성 옛청동초엔 야적물 가득 '눈살'

판수교 지나 노란 향 금계국 미소 활짝
청산정, 아래 보청천·뒤 도덕봉·덕위봉

16개 비석 자리 이상성 '청산예찬' 시비
교평삼거리, 가게마다 정순철 선생 숨결

박연수 <산악인>목골재 내려와 목동리 느티나무 쉼터에잡초무성 옛청동초엔 야적물 가득 '눈살'판수교 지나 노란 향 금계국 미소 활짝 청산정, 아래 보청천·뒤 도덕봉·덕위봉16개 비석 자리 이상성 '청산예찬' 시비교평삼거리, 가게마다 정순철 선생 숨결 목(못)골고개를 내려와 구비를 도니 저 멀리 구병산자락이 펼쳐진다. 손을 길게 뻗으면 닿을만한 자리에 펼쳐진 구병산. 구병산의 풍광에 넋을 빼앗긴 사이 벌써 목동리 느티나무 쉼터에 도착했다.

수령이 400년이나 된 이 느티나무는 어른 6명반이 팔을 벌려야 잡을 수 있다. 가지는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으며, 땅과는 악수를 하고 있다. 원래는 가지가 세 갈래였는데 동쪽가지가 부러져 두 가지만 남아있다고 한다. 지원조가 준비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동네 할머니가 걸레를 들고 올라오신다. 손님이 왔으니 정자를 닦아 주신다고… 가슴에 진한 여운이 몰려온다. 우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점심을 먹은 후 정자에 누웠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목동리는 전주이씨의 집성촌으로 400여년전에 마을이 만들어 졌다고 기록돼 있지만 마을 한 주민의 이야기는 다르다. "마을위에 샘이 있는데 문둥병이 있는 사람이 물을 먹고 다 나았다. 그 이후로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그 시기는 이씨조선 500년 때로 원래 세구멍에서 물이 나왔는데 지금은 한군데서만 나온다"고 설명한다. 현재는 14가구 16명이 살고 있고 13가구는 전주 이씨이고 1가구만 전의 이씨가 거주한다.

마을 주민을 만나 쌀아티 발음을 확인한 이상기 교수는 "언어·문화적으로 목(못)골재는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지점으로 볼 수 있으며 연구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곳 목동마을을 지나며 말씨뿐만 아니라 주 작물이 고추, 깨, 인삼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목동저수지를 지나 하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폐교된 학교가 보인다. (옛)청동초등학교다. 폐교된 학교 운동장엔 잡풀만 무성하다. 운동장엔 검은 덮게를 씌운 야적물이 보인다. 확인을 해보니 스티로폼 종류로 햇볕과 비바람에 분해되어 심각해 보인다. "학교 고개 너머 세탁기와 냉장고를 최종 폐처리 하는 업체에서 철판하고 우레탄을 분리해 우레탄만 쌓아놓은 것이다. 공장에도 가득 쌓여 있는데, 회사 뒤에는 분진이 날려 숲에 널려 있다. 군청에 민원도 내고 진정도 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고 울타리에 조그만 사철나무만 심고 끝"이라고 동네주민은 불만을 떨어 놓았다.

목동천을 따라 판수교·판수2교를 지나니 금계국이 환하게 웃고 있다. 도종환선생의 시 '흔들리지 않고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의 주인공인 금계국은 지금도 흔들리며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아픔과 사고를 통찰하지 못하고 한줄 서기만을 강요하는 교육의 현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금계국은 흔들리며 노란 향을 피워내고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지않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있으랴

젖지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세상 그 어떤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않고 가는 삶이 어디있으랴

판수3교에서 다리를 건너 뚝길을 따라가니 보청천을 만난다. 보청천은 보은군 내북면 상궁에서 발원하여 만월에 이르러 천왕봉에서 발원한 삼가천을 담아내고 청산뜰에 이르러 세를 과시한다. 청산 들판을 지난 물길은 청성면 고당리에서 금강을 만나 합류된다. 청산교를 건너 청산정에 이르니 아래로 보청천이 휘감아 돌고 뒤로는 도덕봉과 덕의봉이 청산벌을 병풍처럼 둘러 쌓고 있다. 청산정에는 면내에 있는 16개의 비석을 한군데 모아 세워 놓았으며, 이상성 시인의 '청산예찬' 시비가 서 있다.

우뚝 솟은 도덕봉에

산새소리 즐겁고

보청천 맑은

물에 고기들이 노는 곳

칠보단장 이름난

살맛나는 고장

청산의 명성을 이어가리라

- 중 략 -



동학횃불 밝히고

독립만세 외쳤던

정의로운 인물이

자자손손 이어진

민족혼이 깃든 곳

서로 믿고 도우며

한마음 한 뜻으로

청산에 살리라.

칠보단장(七洑單場)은 물을 가두는 7개의 보와 단하나의 장터를 의미하는 것이다. 7개의 보는 보청천을 가로막은 수중보를 의미한다. 칠보는 청산의 예실보를 시작으로 봉황보, 집맞보, 새들보, 장사래보, 산계보 이며 청성면의 안이미보가 7번째 보가 된다.

청산은 동학농민군 최초의 방포령(싸움을 시작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곳이다. 3만여명의 동학농민군이 집결해 보은의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돌진했던 역사적 사건의 땅이기도 하다.

교평 삼거리를 지나 면사무소쪽으로 들어가는데 가게마다 간판이 일정하게 정리됐으며, 같은 인물의 간판이 붙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엄마 앞에서 짝자꿍’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의 작곡가 정순철 선생(1901~?)의 간판이 보인다.

 

목(못)골고개를 내려와 구비를 도니 저 멀리 구병산자락이 펼쳐진다. 손을 길게 뻗으면 닿을만한 자리에 펼쳐진 구병산. 구병산의 풍광에 넋을 빼앗긴 사이 벌써 목동리 느티나무 쉼터에 도착했다.

수령이 400년이나 된 이 느티나무는 어른 6명반이 팔을 벌려야 잡을 수 있다. 가지는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으며, 땅과는 악수를 하고 있다. 원래는 가지가 세 갈래였는데 동쪽가지가 부러져 두 가지만 남아있다고 한다. 지원조가 준비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동네 할머니가 걸레를 들고 올라오신다. 손님이 왔으니 정자를 닦아 주신다고… 가슴에 진한 여운이 몰려온다.

우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점심을 먹은 후 정자에 누웠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목동리는 전주이씨의 집성촌으로 400여년전에 마을이 만들어 졌다고 기록돼 있지만 마을 한 주민의 이야기는 다르다. "마을위에 샘이 있는데 문둥병이 있는 사람이 물을 먹고 다 나았다.

그 이후로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그 시기는 이씨조선 500년 때로 원래 세구멍에서 물이 나왔는데 지금은 한군데서만 나온다"고 설명한다. 현재는 14가구 16명이 살고 있고 13가구는 전주 이씨이고 1가구만 전의 이씨가 거주한다.

마을 주민을 만나 쌀아티 발음을 확인한 이상기 교수는 "언어·문화적으로 목(못)골재는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지점으로 볼 수 있으며 연구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곳 목동마을을 지나며 말씨뿐만 아니라 주 작물이 고추, 깨, 인삼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목동저수지를 지나 하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폐교된 학교가 보인다. (옛)청동초등학교다. 폐교된 학교 운동장엔 잡풀만 무성하다. 운동장엔 검은 덮게를 씌운 야적물이 보인다. 확인을 해보니 스티로폼 종류로 햇볕과 비바람에 분해되어 심각해 보인다.

"학교 고개 너머 세탁기와 냉장고를 최종 폐처리 하는 업체에서 철판하고 우레탄을 분리해 우레탄만 쌓아놓은 것이다. 공장에도 가득 쌓여 있는데, 회사 뒤에는 분진이 날려 숲에 널려 있다. 군청에 민원도 내고 진정도 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고 울타리에 조그만 사철나무만 심고 끝"이라고 동네주민은 불만을 떨어 놓았다.

목동천을 따라 판수교·판수2교를 지나니 금계국이 환하게 웃고 있다. 도종환선생의 시 '흔들리지 않고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의 주인공인 금계국은 지금도 흔들리며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아픔과 사고를 통찰하지 못하고 한줄 서기만을 강요하는 교육의 현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금계국은 흔들리며 노란 향을 피워내고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지않는 꽃이 어디있으랴이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있으랴 젖지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세상 그 어떤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않고 가는 삶이 어디있으랴 판수3교에서 다리를 건너 뚝길을 따라가니 보청천을 만난다.

보청천은 보은군 내북면 상궁에서 발원하여 만월에 이르러 천왕봉에서 발원한 삼가천을 담아내고 청산뜰에 이르러 세를 과시한다. 청산 들판을 지난 물길은 청성면 고당리에서 금강을 만나 합류된다. 청산교를 건너 청산정에 이르니 아래로 보청천이 휘감아 돌고 뒤로는 도덕봉과 덕의봉이 청산벌을 병풍처럼 둘러 쌓고 있다. 청산정에는 면내에 있는 16개의 비석을 한군데 모아 세워 놓았으며, 이상성 시인의 '청산예찬' 시비가 서 있다.

우뚝 솟은 도덕봉에 산새소리 즐겁고보청천 맑은 물에 고기들이 노는 곳칠보단장 이름난살맛나는 고장청산의 명성을 이어가리라 - 중 략 -동학횃불 밝히고독립만세 외쳤던정의로운 인물이자자손손 이어진민족혼이 깃든 곳서로 믿고 도우며한마음 한 뜻으로청산에 살리라.칠보단장(七洑單場)은 물을 가두는 7개의 보와 단하나의 장터를 의미하는 것이다.

7개의 보는 보청천을 가로막은 수중보를 의미한다. 칠보는 청산의 예실보를 시작으로 봉황보, 집맞보, 새들보, 장사래보, 산계보 이며 청성면의 안이미보가 7번째 보가 된다.청산은 동학농민군 최초의 방포령(싸움을 시작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곳이다.

3만여명의 동학농민군이 집결해 보은의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돌진했던 역사적 사건의 땅이기도 하다.교평 삼거리를 지나 면사무소쪽으로 들어가는데 가게마다 간판이 일정하게 정리됐으며, 같은 인물의 간판이 붙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엄마 앞에서 짝자꿍’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의 작곡가 정순철 선생(1901~?)의 간판이 보인다.

정순철 선생은 청산면 교평리 출생으로 색동회 창립 맴버이며 월간 ‘어린이’ 창간, 청소년 계몽 운동 등 어린이와 청소년 사랑에 앞장서 온 분이다. 또한 동학 2대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정순철 선생은 월북인사로 시대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가 도종환선생의 ‘정순철 평전’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청산면은 정순철 기념사업회를 통해 동요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벽화가 그려진 동요의 거리는 정감을 자아내고 있다. 60~70년대의 정감어린 모습을 담아낸 그림을 보니 콧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엄마 한숨은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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