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경사 부조금 스트레스
애경사 부조금 스트레스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2.07.11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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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신랑·신부나 혼주와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결혼식엔 안 가는 게 예의"라는 말을 '반갑게'들은 적이 있다. 예식장 뷔페 식사비가 1인당 3만원인데 약소한 축의금 내면서 축하한다고 가서 식사까지 하면 되레 결례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이젠 지인들 자녀 결혼식에 가지 않아 찜찜해 할 필요 없겠구나'안도했다. 얼굴도장 찍으려고 생판 본 적도 없는 주인공들 결혼식에 가느라 휴일 소비한 게 얼마나 많았던가.

천안시 공무원직장협의회(공직협) 조사에 따르면 경조사비는 3만원이 적당하다고 시 직원 62%가 답했다. 뷔페 식사비를 생각하면 부조금만 낼 경우의 액수로 추측된다. 1800여명 시청 동료·상사·부하 경조사에 모두 갈 수는 없지만 언제 얼굴 마주칠지 모르는데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이번 공직협 조사에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직원 내부 공지에서 '배우자의 부모상'은 빼자는 의견도 17%나 됐다. 챙겨야 될 애경사가 너무 많으니 장인·장모상이나 시부모상은 부조하지 말자는 소리다. 조부모상 공지에 찬성한 사람은 11%에 머물렀다.

부조(扶助)는 글자 그대로 좋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의례를 치르는데 돕는 걸 말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기엔 부조는 장례 때 많이 이뤄졌는데 이후 점차 혼례, 회갑 으로 확대됐다고 한다. 처음엔 돈이 아니라 의례에 필요한 물품으로 부조했다. 쌀, 콩, 기름, 곶감, 잣, 대추 등을 보내고 또 일손을 도와주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당시 부조는 어느정도 했을까.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예를 보자. 그는 영조 때 반란 진압에 참여해 공신(총 15명)에 올라 땅과 재물을 하사 받았고 관찰사와 판서에 올랐다. 고위직 관료인 박문수는 같은 공신의 부인이 죽자 다른 공신 두명과 함께 포목 10필을 부조했다. 지금 돈가치로 따지면 40만~50만원 정도다. 3인으로 나누면 일인당 10만원대를 낸 셈이다. 부조 물품은 상주에게 직접 건네지 않고 국가기관인 충훈부를 통해 전달해 공개적이고 투명한 부조가 되도록 했다.

그러나 17세기가 되면서 현금 부조가 등장했다. 현금 부조 사례는 숙종 때 역관 홍우재가 쓴 통신사 일기(1682년)에서 처음 확인되고 18세기 후반 다산 정약용도 상사에게 1000전을 부조했다는 사실을 시문집에 남기고 있다.

그러면서 부조문화가 어려운 일을 서로 돕는 환난상휼(患難相恤) 개념에서 벗어나 실리적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부조 받은 횟수에 맞춰 부조하는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한 관료가 이 같은 세태를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현세엔 어떤가. 1970년대까지 농촌에선 의례에 필요한 쌀, 감주 등 물품을 부조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현금 부조로 빠르게 변모했다. 전화송금, 계좌이체가 쉬워졌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천안 공직협 조사에서 부조금 전달이 불편하니 공지 때 "아예 통장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의견이 51%나 나왔다. '대리 전달자' 찾기도 힘들고 배달사고 위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대리 전달자는 이 일을 하느라 본 업무는 못 볼 지경이란다. 허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아 실현되진 않을 듯하다.

"장인상, 조부상도 부조해야 하나?" "얼마나 해야 하지?" 부조금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방도는 없을까.

부조 범위 및 액수에 대한 나만의 원칙을 정해, 주위 애경사에 대응하고 자신의 애경사 공지 때도 적용하면 어떨까. 욕을 덜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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