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추의 계절에…
비비추의 계절에…
  • 김성식 기자
  • 승인 2012.06.1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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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기자의 생태풍자
김성식 생태전문기자<프리랜서>

1917년 어느 날 제주도에 심상찮은 외국인 무리가 도착했다. 미 하버드대 부설 아놀드수목원의 아시아식물 채집담당인 윌슨 일행과 프랑스 신부 타케,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타케노신 등이었다. 목적은 한라산 자생식물 구상나무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3년 뒤 윌슨은 구상나무를 이 지구상에 단 일속일과만 있는 신종으로 발표했다. 이름하여 아비에스 코레아나(Abies koreana: 구상나무의 학명)가 학계에 처음 알려진 계기다.

한국특산 구상나무가 예사식물이 아니란 걸 처음 눈치챈 이는 프랑스 신부 타케와 그의 동료 포리였다. 타케와 포리는 1900년대초 한반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식물종 수만 점을 채집해 고국인 프랑스 외에도 미국과 독일, 스위스 등지에 제공한 '전문꾼'들로서 1907년엔 외국인 최초로 한라산에서 구상나무 표본을 채집해 윌슨에게 보낸 장본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당시 구상나무의 학술적 가치에 관해선 잘 몰랐으며 윌슨의 안내역을 맡았던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마저도 분비나무로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한다.

윌슨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간 구상나무는 얼마 안가 '코리안 퍼(Korean fir)'라고 불리는 값비싼 크리스마스 트리로 개발돼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윌슨은 그 밖에도 노각나무, 금낭화 같은 한국산 식물 300여종을 채집해 갔으며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아놀드수목원에는 130종이 넘는 한국산 식물들이 길러지고 있다고 전한다.

한국산 식물자원의 국외반출과 관련해 꼭 알아야 할 사람이 또 있다. 1980년대 미 국립수목원 아시아식물 담당자였던 베리 잉거다. 그는 1984~89년까지 5년간 채집원정단을 이끌고 세 차례에 걸쳐 홍도와 소흑산도 등 한반도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수많은 희귀식물을 채집, 반출해간 장본인이다. 당시 미 동부지역에서 이상한파로 많은 식물들이 죽자 혹한에 견딜 수 있는 내한성 식물을 조사, 채집해 간다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나 그건 핑계였을 뿐 식물자원의 공식 반출 다시 말해 공식적인 도둑질이었다. 그 한 예가 당시 홍도에서 채집해 간 비비추를 자신의 이름을 따 '잉거비비추'란 이름으로 미국 비비추협회에 신품종 등록한 것만 봐도 뻔한 속내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해외 반출된 자원이 어디 식물자원에 그치고 야생에만 한정됐겠는가. 곤충을 비롯한 수많은 야생동물과 토종 가축, 토종 농작물들이 알게 모르게 반출돼 나갔다. 유전자원이 소중한 국부 혹은 자원으로서 보호받지 못한 결과다. 불과 23년전까지만 해도 미국 원정단에게 한반도 전역을 서슴없이 내줬던 우리들 아닌가.

그러던 우리나라가 유전자원에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97년 국외반출 승인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다. 국내 생물자원의 무분별한 국외반출을 막고 고유 생물종을 보호하기 위한 이 제도의 도입으로 현재까지 1971종의 생물들이 승인대상으로 지정돼 있는데 여기엔 올 2월 신규 지정한 물방개와 꼬마사슴벌레 등도 포함돼 있다. 지금까지 국외반출 승인 건수는 5건, 그것도 학술·연구 목적뿐이었다니 당초 우려보단 엄격한 모양이다.

아무쪼록 뒤늦게나마 도입한 이 제도가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과거를 씻고 유전자원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토대가 됐으면 한다. 아울러 2007년부터 힘 쏟고 있는 한반도 토종 유전자원의 반환 노력이 보다 큰 결실을 거두길 기대한다. 비비추가 꽃망울을 맺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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