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3>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3>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7.0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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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하미지방의 성생활 풍속
아내를 빌려드립니다… 금지된 욕망을 누린다

간통시 엄한 처벌 받을거라는 왕의 칙명 내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13세기에 하미는 카물(Camul) 혹은 코물(Qomul)이라 불렀고, 고대 중국에서는 이오(伊吾)로 알려진 고장이다. 주민들은 모두 우상숭배자이며 오락과 악기와 가무를 즐기며 육체적 향락을 즐기는 데만 몰두했다.

어떤 나그네가 자신의 집에 머물려고 오면 너무나 기뻐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나그네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집을 나와 일하러 가서는 2~3일간 밖에서 머무는 데 그 사이 나그네는 주인 아내와 동침을 하고 마치 자기 아내처럼 환락을 즐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나그네가 휴식을 필요로 할 때 그렇게 친절하게 맞아 주었기 때문에 우상이 자기들을 매우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 덕분에 물건과 자식과 재산도 불어나고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모든 일이 아주 행복하게 되고 성공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부인들은 빼어난 미모에 명랑하고 자유분방하며 남편의 모든 명령에 극도로 순종적이다.
   
타타르의 군주인 몽구 카안(Mongu Kaan)이 지배할 때 카물 주민들이 자기 아내로 하여금 나그네와 간통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그네를 재우면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칙명을 내렸다. 카물 사람들은 이 명령을 받고 크게 비통해 하며 왕의 칙명을 약 3년간 준수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늘상 토지에서 수확하던 과일들이 열매를 맺지 않고 집안에도 나쁜 일들이 자꾸 생겨났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상의하여 큰 선물을 가지고 몽구(몽골제국의 4대 군주인 뭉케 카안)에게 가서 이제까지 자기 조상들이 했던 방식대로 아내를 관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탄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상들이 해준 이야기 즉 자기 아내와 물건들로 나그네를 즐겁게 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우상이 매우 기쁘게 생각했고, 그런 까닭에 그들이 생산하는 곡식과 지상에서의 노동이 곱절로 보상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몽구에게 들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몽구는 "너희들이 수치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 가라! 그리고 너희 풍습대로 살면서 너희 아내를 나그네에게 보시토록 하라!" 말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기술하고 있다.

반면, 폴로가 기술한 몽골 인들의 성 풍속을 살펴보면 몽케 칸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 몽골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아내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런 일은 매우 사악하고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내들은 선량하고 남편에게 충직하며 가사일을 아주 잘 돌본다.

혼인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각자 자기가 원하는 만큼 아내를 둘 수 있는데 능력만 있다면 100명까지 둘 수 있다. 남자는 아내의 어머니에게 신부대를 주지만 아내들은 남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아내들 가운데 첫째 아내를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높고 휼륭하게 여기는데, 그 까닭은 남편이 많은 수의 아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형제들을 취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죽으면 큰아들은 자신의 생모가 아닌 한 아버지의 부인들을 아내로 삼는다. 또한 자기 형제가 죽으면 그 부인도 취한다. 그들은 아내를 맞이할 때 거창한 혼례를 올린다.

동방견문록 86장에서 당시의 우리와 비슷한 풍습을 서술하고 있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어느 누구도 문지방을 건드려서는 안되고 발을 뻗어 건너야만 한다. 만약 부주의로 누군가 그것을 건드리게 되면 문 앞에 서 있는 보초들이 그의 옷을 빼앗은 뒤 그것을 되사가도록 한다. 만약 그 옷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정해놓은 횟수만큼 매를 맞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문지방을 건드리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규칙을 모르는 외래인이 있다면 지정된 신하들이 그들에게 미리 그 같은 규칙을 알려주고 경고해 준다.

루브룩과 카르피니, 오도릭과 같이 몽골리아를 방문한 서구인들은 모두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마크리지와 같은 무슬림들의 글에서도 몽골인들이 남의 집을 방문할 때 문지방을 밟는 것을 극도로 꺼리던 풍습을 기술하고 있다.

한 가지 우리와 같은 풍습을 더 소개하면 사람의 이름에도 '부랄기'라는 말이 쓰이는데 우리말로 주워온 아이란 뜻이다. 이것은 액땜을 목적으로 아이들에게 일부러 나쁜 뜻의 이름을 지어주던 당시 몽골인들의 풍습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문지방 밟기를 꺼리는 것이나 주워온 아이라는 표현은 어린시절 많이 경험했던 우리와 유사한 풍습이다.

포도의 고장 투르판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하미를 경유하여 우루무치로 떠나는 오후 1시 45분 열차에 몸을 실었다(63元). 하미에서 투르판 사이의 들판도 천산의 검은 산맥들의 영향을 받아서 사막의 표면은 검은색조를 띠고 있으며 속살은 황토층이다.

사막이라 하면 흔히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에 나오는 끝없는 모래벌판 위에 낙타를 타고 가는 캐러번을 연상하기 쉽지만 사막의 풍경도 지역에 따라 변화가 많고 산의 모습과 색깔도 다양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다. 사막에서의 열차 여행은 매우 단조롭다. 몇 시간씩 사람도 볼 수 없는 메마른 들판과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에 젖어 창밖을 응시하노라면 이곳을 오가며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이 저절로 생겨나게 된다. 목숨을 걸고 다닐 만큼 중요한 그 무엇이 있어 저 메마르고 삭막한 들판을 내왕했을까. 현재의 시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황량한 풍경이다.

저녁 6시쯤 작은 마을이 나타나고 철로 주변에 펼쳐진 무덤을 만났다. 시인들의 시 구절에서나 등장하는 상상속의 사막의 묘지를 지켜보면서 야릇한 감정이 솟구쳤다. 풀 한 포기 없는 무덤 앞에 쓸쓸히 꽂혀 있는 나무문패와 작은 비석이 늘어서 있다.

조금 더 달리자 사막 한가운데 보기드문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마을 하천과 하늘로 곧게 뻗은 포플러나무 숲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서 검은 흙먼지에 덮혀 졸고 있다.

하미가 서서히 사막 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다. 오후 6시 50분 투르판 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에서 시내까지 50km 정도의 거리다. 역 앞에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길 없는 자갈밭을 달렸다. 한국에 이런 자갈 벌판이 있다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20분 정도 달려 겨우 아스팔트길로 접어들었다.

40여분 지나 2차로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이곳에서는 아라비아 영화에서 봄직한 위그르 아가씨와 덩치 큰 위그르 남자들을 만날 수 있다. 둔황에서 사막지대로 올라 갈수록 위그르 족들이 많이 보인다. 도중에 뚱뚱하고 덩치 큰 위그르족 호텔안내인이 탑승하여 자기 호텔을 소개하고 다음날 투르판 일일 패키지여행에 대해서 안내해 주었다. 그가 소개하는 교통병관(交通兵館)에 투숙했다(3인방 90元, 4인방 100元).

저녁 때 하미행 기차에서 만났던 여대생들과 만나 함께 신성야시장으로 갔다. 중국에서 공부를 하다 방학 중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팀이다. 갈 때 1元짜리 버스를 타지 않고 지나가는 승용차 크기의 짐차를 세웠다. 여섯 명이서 일인당 50전에 우리나라 닭장이나 싣고 다닐 것 같은 짐차를 탔다. 중국의 교통수단은 이 세상에서 타 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기구가 구비된 곳이다.

후텁지근한 밤공기를 가르며 짐짝처럼 앉아 있는 기분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야시장에 도착하여 위그르 전통 양고기 꼬치구이를 맛보았다. 1개 2元씩하는 이곳의 양고기 꼬치는 다른 지역의 것보다 두 배나 크고 맛도 이제껏 맛본 것 중에 가장 맛이 있었다. 맥주와 곁들여 먹는 양고기 꼬치구이는 한여름 밤의 투르판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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