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달팽이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2.03.0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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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바람이 잠잠해지니 비가 내린다. 창을 여니 비에 젖은 풍경에서 풀려나온 비릿하고도 눅눅한 한기가 밀려든다. 베란다 밖에 놓아둔 민들레 화분은 아직 잠잠하다. 마른 줄기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달랑달랑 흔들리다 흙속으로 스며든다. 톡-톡 일정한 간격을 두고 천천히 차례를 지키며 내려앉는다. 조심스레 뿌리의 긴 잠을 깨우듯. 어느 들에선가는 이 빗소리에 개구리가 겨울잠을 깨고 나오겠다.

베란다에서 겨울을 넘긴 화초들을 살펴본다. 며칠 따사롭던 햇볕에 베고니아 꽃빛이 고와졌다. 문득 얼마 전 시금치를 다듬다 발견한 민달팽이가 떠오른다. 손가락 끝에서 물컹하게 만져지며 소름 돋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움찔 놀라서는 다듬고 잘라낸 이파리들로 덮어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곤 공연히 며칠 마음이 불편했다.

유난히 환형동물이나 파충류에 공포감을 느끼는 내게 채소를 다듬을 때마다 만나는 민달팽이는 고민을 안겨주는 존재다. 시골에 살 때는 한 걸음 나서면 들이고 밭이니 달팽이가 붙은 이파리를 뚝 떼어 던져두면 그만이었는데 아파트는 마땅히 내 보낼 장소가 없다.

여름엔 종종 식구들을 시켜 1층 화단에 놔주곤 했는데 지금처럼 차가운 날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끼는 화초들을 달팽이집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많은 달팽이들이 내가 잠든 밤마다 기어 나와 사각사각 잎을 갉아먹는 상상을 하면 끔찍하니까. 그런데 엊그제 읽은 책 한권이 화근이었다.

'달팽이 안단테'. 서른 넷 젊은 베일리는 유럽 여행 중 미확인 바이러스성 병원체에 감염되어 전신이 마비된다. 정확한 병명도 모른 체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된 채 절망의 나날을 보내는 그녀에게 어느 날 친구가 제비꽃 화분을 하나 들고 온다. 숲에서 발견한 달팽이와 함께.

그들의 삶에 불쑥 끼어든 달팽이 때문에 처음엔 난감해하지만 베일리는 차츰 달팽이의 움직임에 흥미를 갖는다. 달팽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고 달팽이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베일리에게는 "또 다른 생명체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녀는 1년 동안 달팽이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와 서로 볼 수 없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타고난 느린 걸음과 고독한 삶을 사는 달팽이는 그녀의 삶을 지탱해준 스승이었다. 처해진 환경에 적응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달팽이의 삶에 비해 포유류는 불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는 저자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주어진 환경에 스며들기보다 환경을 삶에 맞추기 위해 여전히 무리수를 두는 정책을 강행하고 방관하는 우리 현실이 부끄럽기도 하다.

작은 생명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경건하고 따뜻하게 다가오며 나로 인해 운명이 바뀌어버린 달팽이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조금 더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달팽이에 대한 나의 선택이 바뀌었을까? 베일리가 질병과 고독 속에서 달팽이를 만나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면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여전히 빗방울은 민들레의 잠을 깨우고 있다. 물방울 만하게 패인 자리에 흐릿하게 연두 빛 잎눈이 보인다. 반가움에 기쁨이 샘물처럼 고인다. 이런 소소한 생명의 변화들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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