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의 삼일운동
우리마을의 삼일운동
  • 연규민 <칼럼니스트>
  • 승인 2012.02.28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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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연규민 <칼럼니스트>

청주시 우암산 들머리 삼일공원에는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우리 고장 출신 여섯 분의 동상이 서 있다. 그 중 한 분은 친일행적 때문에 시민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친일을 단죄하려는 시민들의 행동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에 참여하다 변절한 이들에 대해 그러한 단순한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해야 했는가 볼 때마다 착잡하다. 좀 더 소중한 역사교육의 기회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가령 동상을 돌려세운다거나, 그 앞에 뚜렷한 글씨로 그의 행적을 기록해 놓는다거나, 후손의 사과문을 함께 게시하는 방법으로 항일의 시간과 친일의 시간을 함께 기록해야 우리 후손들이 거울로 삼을 것이다.

한편 우리지역을 다니다 보면 역사 기록물이나 기념물이 너무 적어 안타까움이 크다. 곳곳에 관리의 송덕비는 많지만 동학농민전쟁이나 의병, 삼일운동,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과정의 기록물이나 기념물은 거의 없다. 삼일절을 앞두고 우리지역의 삼일만세운동 재판기록을 찾아보았다.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 충청북도편에 우리지역에서 삼일운동과 관련하여 재판을 받은 이들의 판결문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만세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이들은 전체 재판의 7분의 1에 해당한다. 실로 엄청난 수효의 백성이 참가한 운동이었다. 징역 6월 미만의 사건은 미처 다 싣지 못하였다고 하니 실제 잡혀간 이들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피고(인)들의 직업은 농업이 다수이긴 하지만 인력거군, 재봉업, 잡화상, 여생도, 예수교신자, 서당교사, 고용인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는 공무원인 면서기와 소사도 많은 수가 참여하였다. 여생도와 여성도 포함되어 있다. 청주농학교 학생을 비롯하여 옥천에는 61세의 노인도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젊은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만세운동을 부른 것을 넘어 연행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헌병대와 우체국에 돌을 던져 항의하였으며, 봉화를 올리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피로 그려진 태극기를 돌리기도 하였다.

이 기록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일제가 장악한 재판소의 기록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운동과 역사를 기록하지 못하였다. 적들의 기록으로만 봐도 농촌 구석구석까지 참여한 실로 엄청난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을 주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기록물이 없다는 것이 부끄럽다. 가혹해진 일제의 탄압과 해방 후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군부 쿠데타로 인해 민주세력과 민족진영이 탄압을 받는 불행한 현대사가 이러한 기록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이러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 마을마다 삼일운동의 기록과 기념물을 남기자. 기념행사도 하자.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사 문제를 꺼낼 때마다 "과거를 덮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자"고 한다. 그들의 속담에 "물러간 적에게는 복수하지 않는다"는 정신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과 혁명에 관한 각종 기념물을 조성하며 '문화적 실천'으로 과거와 만남을 지속한다.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자. 항일과 독립의 역사뿐만 아니라 친일과 부일의 역사도 그대로 기록하자. 그래서 우리와 후손들의 교훈으로 삼자. 혹시나 내 조상의 친일과 부역의 역사가 있더라도 분명하게 사죄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떳떳하게 다시 서자. 역사를 바로 기록하지 못하는 민족은 부끄러움을 당한다. 이스라엘은 조상들의 수치스러운 역사도 경전 속에 그대로 담고 있다. 그래야 그 민족의 역사는 오래 갈 수 있다. 힘의 문화를 문화의 힘이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 우리가 그 역사를 써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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