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출마하는 이유
개가 출마하는 이유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2.02.2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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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해외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치치올리나'라는 여성을 기억할 것이다. 포르노 배우였던 그녀는 지난 1987년 이탈리아 하원의원에 출마하며 각국의 해외토픽 란을 장식했다.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던 그녀의 도전은 기적으로 이어졌다.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며 깊어진 정치 냉소주의가 그녀를 당선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정치권에 한방을 날린 유권자들은 후련했지만, 포르노 배우의 도전에 무참하게 패배한 이탈리아 정치인들은 경악하고 우려했다. 치치올리나는 유권자들이 각성을 촉구하며 정계에 보낸 메시지였지만, 정치인들은 성찰하지 못했다. 부패와 무능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급기야 국가 재정위기를 맞고야 말았다.

베룰루스코니 총리의 미성년자 매춘과 탈세 혐의로 전국이 뒤숭지난해 치치올리나가 다시 등장했다. 반부패 정당을 만들어 오염된 국가 이미지를 씻겠다며 정치권을 일갈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인들은 포르노 배우의 훈계를 들어야하는 수모를 다시 겪어야 했다. 치치올리나는 자신의 호언대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정치무대에 등장시킨 유권자들의 의도에 역행해온 베룰루스코니는 실각해 재판을 받는 중이다.

해외에서는 가끔 동물들이 선거에 출마해 화제가 되기도 한다. 당선돼서 임기를 누린 동물도 있다. 후보등록과 선거운동 등은 후견인 격인 사람들이 도맡았으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출마당하고 당선당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난 2005년 프랑스 마르세이유 시장선거에 '소시스'라는 개가 출마했다. 이 개는 무려(?) 3.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당히 4위에 올랐다. 이후 '소시스'는 각종 TV 토크쇼에 초대될 정도로 스타가 됐다.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시장선거에는 침팬지가 출마해 40만표를 얻은 적도 있다.

당선된 동물도 있다. 2004년 미국 캔터키 주의 '래빗 해'라는 작은 도시에선 실제로 시장선거에 출마한 개가 3000여표를 얻어 당선됐다. 이 개가 임기 도중 사망하는 바람에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도 역시 개가 바통을 잇는 포복절도할 일이 벌어졌다.

개들에게 권력을 맡긴 이 도시 사람들의 괴팍한 정치적 취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당정치에 대한 조롱이요 도전인 셈이고, 시민들은 스스로 참정권을 포기한 패배주의자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방기하고 왜곡해놓고도 이들은 즐겁다. 개들을 위한 후원회를 만들고 포스터를 만들고 공약을 만들어 개들을 대신해 선거운동을 벌이는 모습은 축제를 방불한다. 이들의 즐거움은 자신들의 지배자가 아닌 자신들이 지배할 진정한 충복을 뽑는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개는 이권에 개입해 뇌물을 받거나 재선에 집착해 감당못할 사업을 밀어붙일 이유도 능력도 없다. 누가 된들 어떠랴 하는 정치적 냉소주의도 한몫을 했을 터이지만 결국 이들은 철저하게 유권자들의 의중에 충실한 대리 권력자를 뽑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온전한 참정권을 누렸다고 볼 수도 있다. 신물이 난 정치인들에게 쇄신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효과도 덤으로 누리면서 말이다.

여·야가 공천 결과를 발표하면서 4.11 총선이 달아오르고 있다. 정당마다 개혁공천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공천 과정에 혹시나 하며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은 '역시나'로 돌아서고 있다. 참신이나 혁신과는 거리가 먼 면면들은 그렇다치고 탈락자들의 반발, 공정성 시비, 탈당, 말갈아 타기 등의 구태가 이번에도 반복될 조짐이다. 상대가 버린 카드를 주워 선거에 임하려는 하이에나 정당들이 등장해 구차한 이합집산을 조장하는 모습도 전과 동이다.

개혁과 혁신의 구호는 졸지에 사라지고 추잡한 권력욕만 남아 유권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정치판을 바라보며 주인에 충실한 개 몇마리가 국회에 진출해 말 그대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인간 말종을 욕할 때마다 꼭 죄없는 개를 동원하는 대한민국에선 가능성 제로의 불경한 상상이다. 결국 정치판의 정화는 유권자들이 최선의 차선을 찾아내는 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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