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층 메뉴얼 된 '모르쇠 전략'
권력층 메뉴얼 된 '모르쇠 전략'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2.02.13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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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영동)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금시초문 이다". "내가 그럴 사람인가". "음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툭하면 듣는 말이다. 비리나 부패 연루설이 제기된 권력자들의 반응은 대개 이 중 한마디로 시작된다. 대부분 당당한 표정에 단호한 어투로 결백을 호언한다. 그러나 열이면 열, 이 발언의 종착역은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라는 구슬픈 멘트다.

꼿꼿하게 세웠던 고개를 푹 숙일 때까지 가는 과정도 안쓰럽다. 누가 봐도 분명한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지만 절대 혐의를 인정하는 법이 없다. 발언의 수위만 슬슬 내려갈 뿐이다. "아랫 사람들이 알아서 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않는다", "명예 훼손에 대해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 "받긴 받았지만 대가성은 없다" 등등의 발뺌으로 일관하다 결국 검찰로 향한다.

전당대회 돈봉투 파문으로 사퇴한 박희태 국회의장도 이 메뉴얼을 그대로 따랐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로 시작해 "혹시 보좌관들이 했나 싶어서 알아봤는데 돈을 준 사람도, 돌려받은 사람도 없더라"를 거쳐 "4년이 지난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다"고 물러섰다가 결국 "내가 다 지고갈 일이다"로 마무리했다. 7순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37일을 버텼다.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도 정확하게 같은 길을 걸었다. "전혀 사실무근이다"로 출발해 "(돈봉투를 받았다 돌려줬다는) 고승덕 의원과는 말 한마디 섞거나 눈길 한번 준 적 없다"를 경유했다가 "내가 무슨 죄인이냐"는 아리송한 넋두리를 끝으로 검찰 소환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이런저런 비리로 사법 처리된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이 숱했지만 쿨하게 혐의를 시인하고 조사에 응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통큰 비리를 저지를 배포도 없고, 뻔한 정황 앞에서 오리발로 일관할 배짱도 없는 서민들에겐 이것이 미스터리다. 왜 그들은 결과가 훤하게 보이는데도 버틸 때까지 버티는 것일까. 가장 근사한 답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이다. 입을 맞추고 꼬리를 잘라 사건을 축소하고, 검찰 수사에 대비해 대응 법리를 구축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불똥을 우려한 윗선이 나서 사건을 덮어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더 큰 건이 터져 묻혀버리면서 유야무야 될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권력자에게 '정직은 최상의 정책이 아니라 최악의 전략'이다. 일찌감치 시인했다고 검찰이 감옥에 갈 사람을 풀어줄 것도 아니잖은가. 그러니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권력을 주물럭거리는 정치인이나 고위층에 대한 국민들 평가는 더 이상 추락이 불가능한 밑바닥이다. 기왕에 버린 몸, 허물 하나 더 쓴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다. 따라서 결과와 상관없이 일단 버티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우리네 권력자들이 버티기를 특기로 삼는 이유가 아닐까.

'정직한 정치인은 한번 매수당하면 끝까지 매수당하는 인물이다'. 링컨 대통령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던 미국의 정치인 사이먼 카메론이 한 말이다. 그는 링컨의 선거 참모들에게 장관직을 보장받고 자기 주의 선거인들을 링컨에 몰아줬던 부패 정치인의 표본이다. 자신의 탐욕을 감추거나 양심 앞에서도 흔들림없이 일신의 영예를 위해 묵묵히 정진하는 정치인이야말로 정직한 정치인이라는 그의 황당한 강변에서는 위선의 정치를 비튼 흔적도 보인다. 적어도 자신이 추구한 욕망에 대해서만큼은 정직해져서 두번 추한 꼴은 보이지 말자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기자의 어줍잖은 풀이에도 일리가 있다면 스스로 저지른 부정에조차 당당하지 못하고 '한번 버티면 끝까지 버티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새겨들을 말이기도 하다.

바람 잘날 없다더니 이번에는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이 건보공단 이사장 재직시 억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에 불려온 그의 첫 일성도 "돈을 주고받은 적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번에도 '모르쇠 메뉴얼'이 반복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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