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법치(法治)
비겁한 법치(法治)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2.01.16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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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소가 굶어 죽는다. 서민들은 명절이나 제사 때 탕국으로나 맛을 볼 수 있다는 금값의 한우가 축사에서는 사료값도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돼 죽어나간다. 얼마 전 전남의 한 축사에서 벌어진 일이다. 논밭 팔고 보험까지 해약해 사료 값을 대다가 돈이 바닥나니 굶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축산농민의 하소연이다. 소값이 바닥을 쳐 사료값조차 건지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죽어가는 나머지 소를 매입하겠다는 행정기관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보면 이런 극단적 선택에는 소고기 시장 개방으로 사단의 빌미를 제공하고도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시위의 의미도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소를 굶겨 죽이고 사체를 방치한 것을 두고 동물보호법에 따라 처벌하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한다. 이 농민은 자칫하면 소 잃고 외양간이나마 고치는 것은 고사하고 소 잃고 과태료까지 물어야 하는 기구한 처지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13개 화학비료 생산업체가 농협의 비료 입찰에 참여해 가격을 담합한 사실이 들통나 828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이들은 투찰가격은 물론 물량까지 사전에 짜고 들어가 입찰과정 자체를 조작하며 원하는 가격에 낙찰받았다. 이런 식으로 16년간 1조6000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겼다고 한다. 지난 2010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들어가자 입찰에서는 낙찰가가 전년보다 21%나 낮아졌다고 하니 이들의 담합 폭리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들 업체가 챙긴 부당이득은 고스란히 값비싼 비료를 구매해야 했던 농업인들이 뒤집어썼다.

시장에 내놔봐야 운송비도 나오지 않자 농가가 수확을 포기하고 배추밭을 갈아엎은 것이 엊그제 일이다. 이런 농업인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담합 행위는 가중처벌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러나 부당이득 1조6000억원에 부과한 과징금은 5%밖에 안되는 800억원대에 불과하다. 적발돼도 90% 이상 남는 장사를 보장해주니 담합이 근절될 리 없다. 적잖은 선진국들은 담합으로 얻은 매출의 수배를 부과해 회사문을 닫을 각오가 아니라면 담합을 꿈도 꾸지 못하게 한다.

여기에 '리니언시'라는 제도도 기업편에서 한몫 한다. 조사 과정에서 자진 신고한 기업에 대해서는 과징금을 감면해주는 제도이다. 이번에 적발된 13개 업체 중에도 1차로 담합을 자진 신고한 업체는 과징금을 100% 면제받았다. 지난 12일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세탁기, 평판TV, 노트북PC 등의 가격을 담합한 삼성전자와 LG전자에 446억원의 과징금을 물렸다. 그러나 담합행위를 1차로 자진 신고한 LG전자는 과징금 188억원 전액을, 2차 신고한 삼성전자는 258억원의 절반을 감면받았다. 범죄를 저지른 2개 기업이 모두 감면 혜택을 받는 희한한 법 집행이 이뤄진 것이다. 이러니 대한민국은 대기업들이 매년 역대 수익 최고치를 갈아치우며 만세를 부르는 천국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소를 굶겨 죽일 수밖에 없었던 축산농민도 노후대책용으로 보험을 들었던 곳이 '삼성생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2500만원짜리 이 보험을 해약해 사료값으로 털어 넣었지만 말이다.

농민의 등을 친 짬짜미가 16년이나 계속되는 동안 단속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는 물론 입찰기관인 농협은 무얼 했는지도 따져야 할 대목이다. 10개가 넘는 입찰 참가업체들이 한통속이 돼 입찰 물량을 골고루 배분하고 각각의 투찰 가격까지 짜맞춰 입찰해온 관행을 16년이 지나서야 눈치 챘다면 이들이 눈뜬장님이었거나 아니면 알고도 묵인했다고 봐야 한다.

사료값이 없어 소를 굶기는 농민에게는 동물보호법을 들이대면서, 담합으로 농민의 등을 쳐 수조원의 이득을 챙긴 기업들은 솜방망이 과징금도 모자라 '리니언시'라는 제도까지 동원해 구제하는 나라의 농민은 이민이라도 가야하는 걸까. 뻔뻔스러운 법치(法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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