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위례성의 '불편한 진실'
천안 위례성의 '불편한 진실'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1.12.1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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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22일 천안박물관에서 '천안 위례성 및 주변 유적' 심포지엄이 열린다. 발표자들 주제마다 초도(初都)라는 단어가 끼어 있다. 첫 도읍지란 뜻이다. 천안의 성거산 인근 산성 터가 백제 시조 온조왕이 처음 자리를 튼 위례성임을 증명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발표임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사학계는 천안 위례성이 백제 첫 도읍지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서울 한강 유역=백제 첫 도읍'을 정설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학계에선 무신경인데 일부 학자들만 천안으로 불러모아 논의하고 주장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불편한 진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안시는 수년 전부터 천안이 백제 초도지임을 증명하려 온갖 노력을 쏟고 있다. 523m 산 정상에서 위례성 발굴 작업을 수차례 진행했다. 2009년부터는 또다시 학술조사가 3차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백제 초도설을 입증할 고고학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많은 토기 조각들이 발견됐지만 가장 오래된 것이 4~5세기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온조가 도읍한 기원 전후 시기의 것은 찾지 못했다.

애당초 발굴로선 밝히긴 어려운 사실이었다. 우리나라 어디서든 2000여 년 전 도읍지 유물이 산꼭대기서 나온 적은 없다. 그렇지만 천안시 의뢰를 받은 기관이 발굴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큰돈을 주니 땅을 팔 뿐이다.

직산(천안) 위례성설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 비롯됐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어디인지 모른다는 위례성을 '지금의 직산'이라고 썼다. 이후 이 주장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으로 이어졌다. 천안에 온조사당을 짓는 등 백제 초도설을 굳게 믿었다. 이런 믿음 속에서 15세기 서거정은 백제 근원지를 기념하는 누각에 대한 글을 짓기도 했다(濟源樓記).

그런데 다산 정약용이 직산 위례성설을 뒤엎고 서울(강북) 위례성설을 내놨다. 큰 호응을 얻어 20세기 근대사학 도입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삼국 초기 역사를 밝히는 문헌은 많지 않다. 삼국사기와 삼국지(중국)는 서로 맞지 않는 내용이 있어 혼란스럽다. 주변 정황에 따른 대세론을 펼 수밖에 없다. 주변 사실과 맞아떨어지는 그럴 듯한 학설을 내놔야 한다. 일연 이후 500여년간 지속된 직산 위례성설이 부정되고, 정약용의 한강유역설이 자리 잡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알다시피 온조는 유리왕이 고구려 왕위에 오르자 압록강변 졸본성을 떠나 남하했다. 당시 평안도에 있던 낙랑군을 비켜 임진강·한강을 건너 마한지역에 들어섰다. 온조가 경기도에 있었을 마한 소국들을 거쳐 천안까지 한 번에 내려왔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마한 맹주국인 목지국이 천안에 있었다면 처음부터 마한이 온조에게 중심지를 내준 꼴이다.

향토사학자 임명순씨가 이번 심포지엄에서 정약용을 반박하고 나서 주목된다. 그는 한수(漢水)의 한(漢)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크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한수가 지금의 한강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안성천일 수 있다고 했다.'북쪽으로 한수를 두르고 있다'는 위례성을 직산으로 잡기 위한 해석이다.

그러면 온조가 도읍을 옮기는 한산(漢山)도 일연이 말하는 경기도 광주가 아니라 다른 곳일 수 있다. 이처럼 문헌 해석은 어렵다.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가 들어맞지 않을 때가 많다.

천안시는 온조가 13년간 도읍한 직산 위례성을 증명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2000년 전 '13년 도읍지'의 증거 찾기가 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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