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 시비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학생인권조례 시비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12.14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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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타임즈의 주장
올해 지방의회의 마무리를 앞두고 학생인권조례 논란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이미 초안이 마련돼 의회 의결을 앞두고 있는 서울은 찬반 단체 간 막판 여론전이 치열하고, 충북 역시 조례 제정에 따른 설문조사를 놓고 찬반 세력들이 서로 핑퐁식 성명전을 펴는 등 시끄럽다.

학생인권조례는 지난해 10월 우리나라 진보교육감을 대표하는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에 의해 처음 공포된 후 줄곧 논란을 빚어 왔지만 각 시도 교육계의 고민은 여전하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해당교육감의 정치적 성향, 그리고 지역적 사정 등이 걸림돌이 돼 애초부터 일관된 잣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충북에선 최근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본부가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결과 각각 87%, 94.6%의 압도적 찬성률을 보였다고 발표하자 충북교총이 설문의 신뢰와 객관성에 문제가 있다며 공동검증을 제의하는 등 연일 공방이 빚어지고 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작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식이라면 문제 자체가 본질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숫자다툼이나 벌이며 서로 외피적인 명분찾기에 골몰할 게 아니라 학생인권조례의 원초적인 당위성, 다시 말해 과연 그것이 꼭 있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과정부터가 더 절실하다는 것이다. 가장 교육적인 차원의 학생인권문제를 다룬다면서 현실에선 정략적 발상의 포로가 되지는 않았는지 당사자들이 한번 냉정하게 되돌아보기를 바란다.

현재까지 각 지역에서 공포되었거나 검토되는 학생인권조례는 교육의 3주체라 할 수 있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의 인권과 권리를 제도적인 법 구조의 틀에서 보장하자는 게 근본 취지다.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학교장과 교직원, 학부모 등의 조례 준수 의무는 물론 학생 스스로의 의무와 책무성도 함께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꼭 법이나 조례로 만들어서 규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출발한다. 법에 앞서는 것이 도덕과 양심이라는 이른바 삶의 공식, 거기에다 학생은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고 스승은 제자를 자식처럼 훈육한다는 우리나라 전통 교육관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학생과 교사의 관계를 일종의 법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선 좀 더 충분한 시간과 냉철한 판단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총체적인 컨센서스가 전제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금언은 바로 이런 데에 뿌리를 둔다. 하물며 찬반 단체들이 딱 갈라 서서 몇 명이 찬성하고 몇명이 반대했는지를 다툰대서야 어디 믿음이 가겠는가.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들 중 과연 얼마나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지 한번 묻고 싶다. 찬반 양측이 자기들만의 논리구축을 위해 학생과 학부모를 동원하는 것엔 앞으로 신중했으면 한다.

학생인권조례의 발상은 선생답지 못한 선생과 학생답지 못한 학생 때문에 비롯됐고, 이를 명문화된 제도로써 규제하겠다는 취지다. 학교 현장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교육적 관계가 붕괴되고 선생과 학생 사이의 물리적 관계만이 득세함으로써 더 이상 인성(人性)의 가치관만으로는 학생인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조바심은 맞다. 교사가 학생을 폭행했다며 수업 중에 경찰관이 들이닥치고 초등학생이 여교사에게 주먹을 휘두르는가 하면, 초중고 교사 중 67%가 학생생활지도를 사실상 포기할 정도로 황폐해진 교실이라면 더 이상 말로써는 안 된다. 법이나 제도를 들이대도 해결될지 말지다.

하지만 우리가 마지막까지 경계할 것은 세상에 완벽한 법이나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되도록이면 만들지 말아야 하고 설령 만든다고 하더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탈이 없다.

건국의 아버지로 공리주의에 투철한 '미국의 정신'을 기초한 프랭클린이 가장 걱정한 것도 바로 이런 문제다. 그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개인 또는 정당의 편견과 오판, 열정, 그리고 정략적 목적과 개인, 지역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아울러 법과 제도의 제정 당시와 시간이 흐른 뒤의 환경은 다를 수가 있기에 마지막까지 그 합리적 절차와 과정을 지키라고 경고했다. 법이건 제도건 함부로 만들지 말 것을 후세에 고언한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현장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는 공교롭게도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 '완득이'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완득이가 소설과 연극에 이어 영화에까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대박을 터트린 이유가 있다.

열여덟살의 반항아 '완득'과 그를 끊임없이 간섭하며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려는 담임교사 '동주', 이 둘의 관계는 '천하의 싸가지 없는 문제아'와 '제발 죽었으면 하고 교회에서 기도할 정도의 철천지 원수 똥주선생'으로 시작됐지만 피날레는 서로가 지고지순의 멘토와 멘티 관계를 나누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초저제작비의 아주 하찮은() 이 영화가 무려 500만이라는 관객을 동원한 힘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관계는 바로 이래야 한다는, 그 믿음과 신뢰, 그리고 신념의 사랑에 대리만족을 느꼈든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다들 마음속으로 그렸다는 의미가 아닐까. 만약 이들에게 실정법을 들이댔다면 두 사람 모두, 초장부터 무슨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를 뒤집어쓰고 헤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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