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나비
생각의 나비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1.11.24 18: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사람들은 모두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좋은 글인지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나름대로의 표준이 있겠지만, 한 가지만 말해보자. 글 좀 쓴다고 하는 분들이라면 과연 자신의 글이 이 원칙을 지키고 있나 되돌아보고, 글을 처음 쓰는 초년병들은 이대로 한 번 해보자.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 잘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말한다.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을 보라. ‘정신지도의 규칙’(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은 데카르트가 쓴 미완성 작품이기도 한데, 그는 늘 생각이 똑바로 되려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형식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성을 제대로 이끄는 방법을 찾으려 했고, 그래서 ‘이성의 지시법’(Rules for the Direction of the Mind)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초기작품인 것으로 보아, 데카르트의 일생의 관심은 ‘똑바로 생각하기’였음이 분명하다. 풀어 말하면 ‘생각하기 매뉴얼’ 곧 ‘사고편람’(思考便覽)이고, 요즘의 유행어로 말하면, ‘생각의 나비’ 곧 ‘생각의 내비게이션’인 셈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으니 내 존재의 근원은 생각이라는 주장이다. 나를 긍정하는 생각도, 회의하는 생각도, 모두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이야말로 존재의 제1원리가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생각하는가? 내 앞에 한 다람쥐가 지나갔다고 해보자. 아이가 나에게 묻는다. 저게 뭐야? 대답은, 다람쥐라고 부르고, 도토리를 먹고, 나무를 잘 타고, 성질이 급하고, 쥐랑 비슷해서 다람쥐이고, 등등일 것이다. 이 정도로 모든 대답이 끝나는가? 위의 대답은 그 자체로는 훌륭하다. 그러나 빠진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다람쥐와 다른 것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요즘 산하에는 청설모가 많다. 다람쥐는 줄무늬가 있지만 청설모는 검정만이고, 식성도 다람쥐와 다르게 잡식성이고, 등등, 우리는 다람쥐만큼 청설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어야 아이는 다람쥐라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된다.

그것을 데카르트는 사유의 방법에서 ‘명석판명’(明晳判明: clara et distincta)이라고 불렀다. 이 일본식 번역은 정말 엉망여서 명석이나 판명이나 그게 그거 같다. 구별해보자. 명석은, 자명(自明)함으로 그 자체로 분명함(clear)을 말한다. 판명은 다른 것과의 구별에서 차이가 드러나는 것으로 분별됨(distinct)을 말한다. 우리가 다람쥐만을 아무리 잘 말해보았자 그것은 자명한 것일 뿐이다. 우리가 청설모와 함께 다람쥐를 말할 때서야 다람쥐는 다른 것과 구별된다. 만일 힘이 남는다면, ‘날다람쥐’와도 구별되면 더 좋을 것이다.

많은 글이 자명해서 좋을지라도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다른 것과의 구별 때문이다. 하나로 그치지 않고 다른 것과 함께 있을 때, 그 놈이 판명될 수 있다.(이 글에서조차 ‘명석’과 ‘판명’을 애써 구별하고 있음을 떠올리자.)

따라서 글쓰기에서 오히려 많이 써야 할 관용어는 어떤 형용사나 부사보다도, ‘~이 아닌’이라는 부정어구이다. ‘청설모가 아닌 다람쥐’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오늘 그녀를 만난 나의 기분은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고>, 야릇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어려운 것도 된다. ‘통일정책은 <자유민주주의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닌> 총체적인 세계평화를 지향한다.’ ‘오늘의 유세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일회적인 쇼가 아닌> 민족의 영혼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글은 <단순한 기사가 아닌> 정치적 선언이었다.’ 등등.

나는 요즘 공부가 아닌 딴 짓에 바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