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605억 투입 옛 모습 관광자원화
20년간 605억 투입 옛 모습 관광자원화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1.11.10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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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읍성 복원 현장을 가다 - 경주읍성
경주하면 신라다. 천년 수도 신라를 경주로 인식하고 있음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더구나 통일을 이루며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는 21세기 경주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한국의 대표 문화역사지다.

신라로 압축된 경주는 학생들의 최고 역사문화학습장이다. 천 년 동안 신라의 고도를 유지한 덕분에 곳곳에 남아 있는 문화재와 유적지는 경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문화 아이콘이다.

하지만 경주에는 신라만 존재했던 도시가 아니다. 신라 이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천 년 이상을 사람들이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경주를 통치했던 행정중심지로 경주읍성이 세워졌다.

1798년 제작된 '경주읍내전도'를 보면 사대문을 둔 경주읍성 안에는 동헌과 객사, 태조 어진을 모신 집경전, 감영, 양무당, 진고당 등이 기록돼 있다.

또 특이하게도 성벽을 빙 둘러 치성이 조성돼 독특한 읍성구조를 보여 준다.

도심의 축으로 건재하던 이 성벽도 일제강점기에 헐리기 시작해 1912년 남문이 철거되고 현재 민가 뒤로 동쪽에 길이 95m 성벽만 남아 있다.

신라 멸망 이후 경주의 천 년 역사를 함께해 온 경주읍성이지만 일본의 강제 철거와 근현대의 도시개발 사업 속에서 옛 모습은 몇 장의 지도의 사진 속에만 존재한다.

이후 광복과 함께 신라로 응집된 경주의 문화전략은 고려와 조선의 문화권과 멀어지면서 50여년간 경주읍성도 조명받지 못했다.

경주시가 경주읍성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0년대 접어들면서다.

구시가지 활성화를 위해 첫 작업으로 고려와 조선의 행정중심지인 경주읍성에 눈을 돌렸고, 복원 추진으로 대대적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경주읍성 복원은 원형 복원을 기치로 천년 신라와 천년 이후를 관광자원화하고, 이를 통해 거대 역사문화 사적지로의 총체를 만들어 나간다는 계획이다.

또 사적지로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당장의 복원보단 20년 장기적 프로젝트로 605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복원을 실행 중이다.

복원 추진 사업으로 토지 2만6660㎡ 매입, 건물 143호 철거, 복원 기본계획 수립, 발굴조사, 동·북측 성벽 1100m 및 동·북문 복원, 치성(雉城) 12개소, 성내 유적 복원 정비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축성 1000주년이 되는 2012년에는 동문과 동쪽성벽 일부를 추가 복원해 관광자원화한다는 계획이다.

경주읍성 탐방에 나선 날은 비가 오고 월요일이라선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관광코스 대부분이 신라 문화유적지로만 잡혀 있어 경주 구시가지인 경주읍성 주변은 한가한 모습이다.

경주 구시가지로 접어들자 낮은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번잡하지 않은 거리와 낮은 주변 건물과 어우러진 성벽은 고도 경주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났다.

실제 경주읍성 자리에는 일부 성벽만 복원돼 있었고, 성벽 앞으로 낡은 경주읍성 비석만 덩그마니 성을 표시하고 있었다.

사라진 성돌은 민가에 담장으로 쓰이거나 학교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성벽 복원 가능성에 희망적이었으며, 성벽 앞에는 그동안 수집한 관련 석조물들을 모아 서두르지 않는 복원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경주시는 이미 사유지가 되어버린 땅을 매입해 펜스를 설치하고, 연차적 복원사업과 발맞춰 발굴작업을 전개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성벽이 철거되면서 성내에 있던 조선의 행정기관 건물들은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전용되다 광복 후 시민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객사였던 동경관은 시민문화센터로 운영되고 있고, 동헌은 경주박물관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경주문화원이 입주해 있다.

2002년부터 시작한 읍성 복원사업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원형 복원에 힘을 쏟으며 부분적이며 단계적으로 진척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주문화원 고복우 사무국장은 "경주시가 읍성 복원을 추진하면서 지역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지만 아직도 복원에 관해선 찬반 양론이 비등하다"며 "읍성복원이 과연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자체에선 더 많이 고민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경주읍성은

경주읍성은 고려 현종 3년(1012)에 축성되었으며, 고려 우왕 4년(1378), 조선 태종~세조년간에 개축하였고, 임진왜란 때 불타고 허물어진 것을 인조 10년(1632)에 중수하고 성문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영조 22년(1746)에 다시 개축했다. 당시 둘레가 약 2300m로 동쪽에 향일문, 서쪽에 망미문, 남쪽에 징례문, 북쪽에 공신문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축성을 시작으로 조선시대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주의 역사와 함께해 온 읍성은 신라 이후 1000년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고려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로서 고려시대에는 동경유수관(東京留守館)이,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아(慶州府衙)가 읍성내에 있었다.

그러나 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헐리고, 일부 남아 있던 동편 약 75m의 옛 성벽을 2004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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