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재생에 초점… 상징거리 조성
도심재생에 초점… 상징거리 조성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1.10.2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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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읍성 복원 현장을 가다 - 대구읍성
우리나라 광역시 중 하나인 대구는 인구 250만의 대도시다. 대구 중구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도심축은 국제도시로의 규모를 자랑할 정도로 크다.

면적에 비례해 현재 대구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구분돼 발전하고 있지만 조선시대만 거슬러 올라도 구시가지인 대구 중구를 축으로 행정과 문화가 발달했다.

이는 청주가 청주읍성자리를 중심으로 번화가가 형성되었듯이, 대구 역시 대구읍성을 중심으로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도심축으로 작용했던 대구읍성은 1906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붉은 성곽이 철옹성을 이루었던 아름다운 성은 곳곳에 흔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 거대한 성곽은 찾을 수 없게 됐다.

◆ 대구읍성 따라 길이 나고

사라진 대구읍성자리에는 4대문 성벽을 따라 4개의 읍성로가 연결돼 북성로,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로 이어진다.

대구 제일의 번화가로 변모한 대구읍성 자리는 대구읍성이 있었던 곳으로만 인지될 뿐 읍성 자체로는 주목받지 못했다.

대구가 읍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2007년 과거 읍성길 살리기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다.

읍성길을 따라 조성된 근대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하고, 4성로를 역사문화벨트화해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목적으로 대대적인 도심재생 정책이 전개된다.

1차 프로젝트로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이 시작되었고, 대구중구청은 62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동성로 가로경관과 상설야외무대, 가로쉼터 등을 조성한다.

또한 근대문화골목디자인 개선사업과 읍성 안의 근대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보수작업이 실시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성로 생계형노점 특화거리조성사업', '대구읍성의 부활, 주민주도의 근대역사문화벨트만들기사업' 등 지속적인 도심재생정책이 추진되면서 대구읍성 복원사업도 활기를 찾았다.

대구의 읍성복원 사업은 원형복원보다는 도심재생에 맞춰 진행됐다.

입이 넓은 항아리모양의 대구읍성 자리는 비록 사대문은 사라졌지만 사대문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을 세워 읍성탐방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 동서로 일부분은 성곽의 위치를 따라 도로에 화강암을 깔아 성곽자리를 표시했고, 길 중간 중간에 성곽 일부를 재현해 눈길을 끈다.

그런가 하면 세심한 부분까지 읍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동서로에는 읍성모양을 주물로 만들어 현재 위치를 알려주기도 하고, 간판이나 가로수 받침대에도 읍성길을 안내해 주는 글씨를 새겨 두었다.

또 행정과 군사지로의 중심지였던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해 기존의 중앙공원 이름을 경상감영공원으로 고쳐 시민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구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문은 번화가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해 인근 망우공원에 실물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세워 대구읍성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1차 프로젝트에 이어 대구 중구청은 2012~2014년까지 3년간 국·시비 70억원을 확보해 옛 대구읍성(邑城)을 상징거리로 만들 계획이다.

구체적인 추진사업으로 대구읍성 내에 설치됐던 북장대(망경루)와 서소문, 공북문 등 주요 시설들을 복원해 흔적을 되살린다는 계획이다.

이처럼 2차 옛 대구읍성 상징거리조성 사업이 마무리되는 2014년이면 4성로를 연결한 대구읍성이 현대적 공간으로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윤순영 중구청장은 '대구읍성상징거리조성사업' 설명회에서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도심재생의 모범사례가 될 것"이라며 "특화거리 조성 및 볼거리 제공 등을 통한 방문객 증가로 지역상권이 활성화되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신제인 터 역사팀장은 "읍성자리가 번화가로 변모한 도시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구는 청주와 비슷하다"며 "원형복원에 초점을 두기보다 성벽길이나, 간판, 읍성길탐방 프로그램 등 도시와 조화를 이루는 형태로 읍성을 복원하고 있는 대구는 청주읍성복원에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구에서 추진했던 성돌모으기 캠페인은 좋은 아이디어임에도 효과를 얻지 못했다"며 "이는 캠페인을 전개하기 전 시민과의 공감대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며 타 지역사례를 마케팅할 것을 권했다.

◆ 대구읍성

토성이었던 대구읍성은 임진왜란에 의해 무너진 뒤 영조 12년인 1736년 돌로 재건축된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이 성은 둘레가 약 2650미터, 성곽의 높이는 서남 약 3.8미터, 동북 약 3.5미터, 성의 폭은 약 8.7미터였으며, 여첩은 819개로 여첩 1개의 길이가 약 3.23미터였다고 한다.

대구읍성은 동문은 진동문, 서문은 달서문, 남문은 영남제일관, 북문은 공북문 등 4개의 정문과 2개의 소문이 있었다.

성곽은 적갈색을 띤 퇴적암을 사용해 쌓아 연자줏빛 아름다운 성을 이루었다.

이후 1870년 대원군의 군사정책으로 성이 보수되고 중수되었다. 읍성 가운데 자리에는 경상감영이 위치해 경상도의 행정과 군의 업무를 통괄했다.

이처럼 영남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던 대구읍성은 1906년 대구부사였던 박중양이 일본의 요구대로 읍성을 헐기 시작해 1907년 4월 완전 철거되었다.

당시 성곽을 이루던 돌은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건축물의 기초재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대구 계성학교의 아담스관과 동산의 선교사 건물, 제일교회, 계산성당 등에 남아 있지만, 성곽도시 대구의 모습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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